[평론]법관의 화법, 우리의 청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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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법관의 화법, 우리의 청취법

고성인터넷뉴스  | 입력 2009-03-19  | 수정 2009-03-19  | 관련기사 건

재판장을 부를 때, 그냥 "재판장님"이라고 하는 것보다 "존경하는 재판장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이 글을 읽거나 읽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시민을 상대로 한 권고가 아니다.

 

미래에 속한 법률가들, 사법연수생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이다. 실물 활자의 확인 충동을 억누를 길이 없는 사람은 `알기 쉬운 사법연수생 예절`이란 제목의 교재 21면을 보면 된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라고 매도할 일만은 아닐 터이다. 나름대로 영어권 국가에서 의원이나 법관의 호칭 앞에 `아너러블`(honorable)이라 붙이는 관습을 번역하여 흉내 낸 에티켓이다.

 

보통 사람들에겐 예사롭지 않은 호칭의 유래나 근거보다 법관들은 왜 그렇게 불리기를 바라는지 더 궁금하다. 자신들의 전문지식과 교양과 인품에 걸맞은 합당한 대우의 요청일까.

 

어쩌면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실체를 가리기 위하여 분에 넘치는 공경을 강요하는 것일까. 그래도 신분의 무게가 부여하는 체면 때문에 차마 호칭에 관한 그 우아한 욕망을 법정 문앞의 안내판에 게시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주기를 원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법관이 존경받는다면, 혹은 존경받을 가능성이라도 기대할 수 있으려면, 오직 재판이라는 행위를 통해서일 것이다.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법관도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 인간의 한 유형인데, 어떻게 판결로만 말하라고 구속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의 근거는 법의 속성에 있다.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

 

법은 인간을 꼼짝 못하게 옭아매는가 하면, 새처럼 자유롭게 만들기도 한다. 법치주의라는 말 대신 "법대로"라는 한마디는 삶의 격투장에서 언제든 써먹을 수 있는 무기다. 권리의식의 고양과 법률 수단의 대중화는 개인의 애정문제부터 정치적 싸움까지 모든 분쟁을 소송화 하고 있다. 인생과 사회와 우주의 모든 고민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바야흐로 법에 넘겨주려 하고 있다. 법과 法감정의 인플레이션 시대다.

 

그런데 법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스스로 생식작용을 통해 탄생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생명력을 형성해가며 인간 제도에 끼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입법자들의 입김이 묻어 있다 하더라도 그 기간이 그다지 길지 않다.

 

따라서 법전이란 창고에 쌓여 있는 법을 그대로 법정에 가져다 사용하기만 하면 `법대로` 되는 게 아니다. 법관의 전문적이고 기능적이며 진지하고 인간적인 해석과 적용 노력이 곁들여져야만 제구실을 할 수 있다.

 

법관은 그리하여 법을 매개로 법정의 마당에서 인간과 사회를 향해 수많은 말을 할 수 있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법관이 입을 다물고 있어도 할 말을 할 수 있는 구조가 거기에 있다.

 

하지만 법관도 사람이고 판사도 관료적 직업인지라, 기회만 있다면 다른 방식으로도 말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전문적 기능과 제도적 신분에 자부심과 애정을 가질수록 지위를 상승시키고 유지하려는 욕망을 뿌리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름대로 정치적 판단과 처세의 필요성을 은근히 느낀다.

 

평소 판결 바깥에서 말할 수 있는 수단과 기회를 확보한 법관은 법원장이나 대법원장 같은 사람들이다. 사법행정 작용을 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기 때문이다.

 

재판과 사법행정 사이의 경계에서 곡예만 잘하면, 직업세계의 성역과 그곳을 바라보는 세속의 사람들 모두가 부러워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아마도 그 경지에 이르면 눈치있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그의 직책 앞에 `존경하는`을 붙일 것이다.

 

사법행정권과 재판 간섭 사이에서의 줄타기

 

성공을 향해 치닫던 법관이 추락 위기에 놓인 모습이란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영철 대법관과 관련된 저간의 사정은 그래서 더 복잡하게 보인다. 안타깝기도 하고, 분노를 일으키기도 한다.

 

지난해의 촛불집회는 단순한 집단시위가 아니라, 정치사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큰 사건이었다. 새 정부는 심각한 위협까지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그와 관련된 수많은 피고인들을 재판하는 행위는 정치적 의미를 많이 함축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사건을 나누어 맡은 판사들은 제각각 재판을 통한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는 셈이었다. 거기에 법원장이 뛰어들어 사법행정권의 발동과 재판 간섭 사이에서 줄타기를 감행했다.

 

동료 대법관이 단장이 된 진상조사단은 신 대법관의 법원장 시절의 행위를 적절한 사법행정권 경계의 밖으로 내몰아버렸다. 조사단의 결정이 아니더라도, 이번 사건이 불거졌을 때 당사자들은 처음부터 솔직하지 못하였다.

 

대법원장과 대법관과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거짓말을 하였다. 고위 법관들의 거짓말은 서로의 존경심을 위한 불가피한 방어 수단이었을까?

 

법이 그렇고, 법관이 그렇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기 때문에 법과 문학의 담론에서 양자의 공통점으로 허구를 들고 있다. 소설은 그렇지, 그런데 법이 픽션이라고? 법이나 소설이 허구라는 진술은 결코 궤변이나 과장이 아니다.

 

엄청난 숫자의 법은 저마다 어떤 이상적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입법자들이 나름대로 싸우고 양보한 끝에 우리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최선의 방책이라고 내놓은 것이니까. 그런데 그러한 법이 제대로 지켜진 적이 있는가?

 

만약 법이 제대로 지켜지기라도 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상적으로 바뀔까? 아무도 그렇게 믿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허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치적 법관들에게 사법 불신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법이 허구라면, 법을 허구로 만든 주역은 바로 정치적 법관들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재판은 법관의 고유한 말하기 방식이다. 물론 유일한 방식은 아니지만 말이다.

 

재판 대신 행정책임을 맡은 법관은 개별 법관의 고유한 말하기를 보장하기 위해 사법행정의 권한을 부여받는다. 그 직무를 함부로 행하다 보면, 법의 허구성을 심화하여 천하에 드러내는 꼴을 당하고 만다.

 

우리는 비록 허구의 제도 속에서 산다는 사실을 자각하더라도 낙담할 이유는 없다. 허구라고 아무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상과 상상의 뼈대로 제작하는 것이지만, 현실을 규정하는 하나의 모델이 된다.

 

그 허구를 근거로 우리는 인간의 문화를 구축해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법의 허구는 문학의 허구와 유사하고, 허구 자체는 거짓말과 다르다.

 

불신의 행동을 한 법관에게 법의 허구성에 대한 책임은 없다. 오직 거짓말에 대한 책임을 물을 뿐이다. <창비주간논평>

 

저자 소개

차병직 / 변호사,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이화여대·서울대 강사.

 

저서로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춤추어라』 『인권』 『시간이 멈춘 곳 풍경의 끝에서』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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