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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인터넷뉴스 | 입력 2013-05-03 오후 02:50:46 | 수정 2013-05-03 오후 02:50:46 | 관련기사 0건
페이스북커 박영호의 '나의 인생살이' 3막 2장 입니다.
[나의 인생살이 49
연애를 열심히 했다.
운동에도 매너리즘이 있다. 특별히 하는 것도 없고 새로울 것도 없고 때 되면 행사하고 추모제 지내고...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화천에 있는 사람과 꾸준히 만났다. 이미 우리는 결혼하기로 했다.
어느 날 다 썩어가는 봉고차를 몰고 화천에 갔다. 처음 가보는 곳이다. 인사하러 가는 것이다. 솔직히 겁도 났다. 하지만 장모님 되실 분은 따뜻하게 맞아 주셨다. 장인어른 되실 분은 화천 군청에 과장으로 근무 하시다가 우리 집사람이 고 2때 돌아 가셨다. 딸 셋과 아들 하나, 그렇게 남겨두고 홀연히 떠나신 것이다. 장모님은 남편이 남겨준 얼마 안 되는 유산으로 자식들을 공부 시켰다. 장모님은 지금도 큰사위라며 나를 아껴주신다. 그러고 보니 나는 우리 집안에서는 장남이요.... 처갓집 에서는 맏사위다. 항상 어깨가 무겁다.
우리 집사람은 화천여고에서 1등 했단다. 그래서 교원대에 86학번으로 2회로 입학했다. 당시에는 전국에서 공부 꽤나 한다는 학생들이 도교육청의 추천으로 입학했단다. 기숙사도 있고, 생활비도 주었다. 그래서 85년 교원대 설립에 대해 일반 국립 사범대의 반발이 엄청 심했다. 내가 85년도 충북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데모가 엄청 심했다. 전두환 정권이 교원사관학교를 만들려고 한다. 교육을 장악하려 한다는 것이 반대의 논리였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것도 맞지만 결국은 국립사범대의 의무발령이 나지 않는데 국립 사범대학이 추가로 생기는데 대한 반대가 더 컷 다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교원대와 인연을 맺은 첫 번째 사건이었다. 그런 학교의 졸업자와 내가 결혼 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 집 사람은 의무발령을 받지 못하고 결국은 교원임용고시를 봤다. 시간이 흘러 지방공무원 하다가 99년 겨울에 교원임용교시에 합격하고 2000년 8월 강원도 철원군 동송의 철원중학교로 첫 발령이 났다. 자기가 하고 싶어 하던 선생님이 된 것이다.
이렇듯 이익과 관련된 집단들의 데모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는데, 이를 논리적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데모를 지원 한다고 나섰다가 결국은 허탈한 감을 느끼고 돌아섰던 일이 운동을 하면서 다반사로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KT의 통신주권 논쟁 이었다. 나는 이 투쟁을 지원하는데 엄청 열심히 했다. 주권이란다. 그래서 열심히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KT 사람들이 투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알고 보니 삐삐 대리점을 받아서 대거 퇴직을 해 버린 것이다. 황당했다.
내가 운전면허를 딴 것은 92년 초였다. 나는 운전면허 시험에 4번 떨어졌다. 실기가 아니라 필기시험에서 떨어진 것이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사회과학적 머리로 재편이 돼 있었는지 도무지 외워지지 않았다. 평범한 문제였지만 문제를 읽고 생각하면 다른 답이 나왔다. 환장하겠네~~~
운전면허 시험에 통과하고 나서 나는 사법시험에 합격한 듯 했다. 내는 대학 가려고 문과로 전과해 학력고사를 봤다. 그런데 지금도 틀린 문제가 생각이 난다. 지리 문제였는데, 다음 중 문전연결성이 가장 좋은 것은? 이라는 문제였다. 정답은 자동차였다. 나는 기차라고 했다. 그래서 틀렸다. 이 한 문제가 왜 이리 오래토록 기억에 남는지를 아직도 모르겠다.
그렇게 딴 운전면허로 화천을 오르락내리락 했던 것이다. 썩어가는 봉고차는 용성이가 주었다. 당시에는 경유 값이 엄청 쌌다. 그래서 끌고 다니는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한 번은 이 차를 타고 속초로 해서 인제. 양구를 거쳐 평화의 댐 쪽으로 갔다. 길이 얼마나 험하던지....차가 올라가지 않았다. 다행히 내가 운전솜씨가 좋아서 무사히 처갓집으로 왔다.
나는 연애하는 내내 우리 집사람이 천사인줄 알았다. 나도 좋아했고 그 사람도 좋아 했다. 말도 잘 듣고....후배니까 내가 뭐라 하면 잘 듣고 맞장구도 쳐 주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후배는 결혼과 동시에 동급이 됐다. 나는 이걸 잊고 자꾸 후배라고 생각했다. 덤비는 것이 싫었다. 차라리 잘 모르는 나이 어린 여성과 결혼했다면 처음부터 인정하면 되는 것을 나는 쉽게 인정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깨달았다. 결혼하면 표가 1대 1이라는 사실을.....지금은 꼼짝도 못한다. 가끔 나는 저항한다. 그래도 내가 선배라고....하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 오히려 면박만 당한다. 나의 최후의 저항 수단은 삐지는 것이다. 입을 닫아 버린다. 더군다나 선생이라는 직업인지라 나를 중학교 2학년 취급한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꼭 따져 묻는다. 답이 틀리면 혼난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답안지를 써달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싸인해서 준다. 그리고는 화장실에 가서 양치한다. 속 내려가라고......아~~~앞으로 펼쳐질 인생에서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종으로 사는 것이 더 편하다는 생각을 한다. 다만 심부름 시킬 때 한꺼번에 시켜줬으면 좋겠다. 일하고 돌아서면 저거 하란다. 어제는 저항했다. 제발 한꺼번에 시키라고.....나도 스케줄 좀 만들어서 취미생활도 하고 싶다고....그러면 한다는 소리가 시키는 거나 잘하란다. 세상에 후배가 선배 부려먹는다. 미치겠다.
93년이 그렇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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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박영호의 부모님 |
[나의 인생살이 50
결혼하다. 2개월 만에 감옥에 가다!
연애 아닌 연애를 한지 3년이 흘렀다. 더 시간을 허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당시 후배는 화천군청에 근무하고 있었고 나는 청주에서 월급도 없는, 아니 돈을 투여해야 하는 민청과 충북연합의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한테 결혼 하겠노라고 했다. 어머니는 반대를 하셨지만 나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역시 어머니는 나에게 지셨다. 5월 29일로 결혼식 날을 잡았다.
결혼식은 충북대 사범대 잔디밭에서 하기로 하고, 형식은 전통혼례식으로 하기로 했다. 충북문화운동연합의 놀이패에서 주관해 주기로 했다. 식당은 학교 구내식당으로 잡고, 청주민청 회원들이 국수를 만들어 일부는 수익사업으로 쓰기로 했다. 결혼사진은 아는 사진관에 가서 부탁을 했다. 우리는 결혼식만 하기로 했다. 숟가락 하나 사지 않았다. 살림은 형편이 되면 장만하기로 했다. 당시 후배가 지방공무원 이어서 타 시도 전출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주례는 내가 총학생회장 할 때 총장님으로 근무 하셨던 선생님께 부탁을 올렸다. 흔쾌히 승낙 해주셨다. 이규문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더니 총장님을 모시라고 했다. 역시 마음이 넓으신 선생님 이셨다.
그렇게 결혼식을 올렸다. 89년 우연히 만나서 91년 청혼을 하고 94년에 결혼 했다.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시집온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결정 이었다. 나는 이 사람이 왜 나한테 시집왔는지 아직도 모른다. 가끔 둘이 대화를 할 때 당신이 나를 너무 좋아했지? 라고 우기는 걸로 대신 한다.
결혼을 하고 우리는 차를 빌려서 내가 운전을 하면서 6박7일 전국 일주를 하였다. 결혼식 날 전국에서 엄청나게 손님들이 왔다. 아마도 국수를 2,000그릇 이상 팔았을 것이다. 학교에 있던 학생들도 함께 먹었다. 먹어줘서 감사했다. 뒤풀이를 하는데 후배들이 발바닥을 엄청 때렸다. 새 신부가 울었다. 그렇게 해서 매질은 끝났다. 아마도 울지 않았다면 나는 작살났을 것이다. 첫날밤도 못치를 뻔 했을 것이다. 내가 청년운동 하면서 들은 애긴데, 부산민청의 어떤 회장은 결혼식 날 쇠파이프로 발바닥을 맞아서 발바닥에 금이 갔다고 했다. 사랑이 넘쳤나 보다.
대전에서 1박 했다. 집사람은 몸이 약한 편이다. 당시에 39Kg정도 나갔으니까...큰일을 치루고 나니까 몸살이 난 모양이다. 그냥 잤다. 이건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광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에 과속으로 경찰한테 걸렸다. 나는 신혼여행 중이라고 봐달라고 했다. 경찰이 봐주었다. 감사한다.
5.18 묘역에 들렀다. 참배를 하고 당시 유행하던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에 나오는 코스로 여행을 했다. 전남 영광 어디쯤에 가서는 교원대에서 운동하던 후배가 발령받아 있던 학교 사택에서 후배랑 같이 잤다. 부산에 가서는 교원대 86의 집사람 친구 집에서 잤다. 그렇게 신혼여행은 오랜 친구들 만나면서 보냈다.
나의 고향 삼척 비화진에도 들렀다. 74년 겨울 어머니와 두 동생과 그렇게 떠났던 고향을 결혼하고 집사람과 들렀던 것이다. 감회가 새로웠다. 비화진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물론 나는 고향에 자주 갔었다. 여름 해수욕하러 가기도 했고, 할아버지 산소에도 갔었다. 그러나 결혼하고 들렀을 때는 정말 감회가 새로웠다. 우리가 살던 집은 없어졌다. 원래 우리 할아버지가 사시던 집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팔았단다. 그리고 아버지가 20살에 결혼해서 독립해 나올 때는 남의 땅을 빌려서 그 위에 집만 지었다. 우리가 고향을 떠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집은 허물어져 없어졌다. 아쉬웠다.
강릉에서는 고향친구들과 놀았다. 원주에 와서는 진희를 만났다. 그리고 청주로 돌아왔다.
강릉에서 일이다. 경포대 앞에 콘도를 빌려놓고 고향 친구 달성이를 만나 술을 엄청 먹었다. 달성이는 남자들끼리 하는 애기로 하면 불알친구다.
이 친구와 얽힌 애기다. 초등학교 1학년쯤이다. 하루는 우리집에서 모여서 함께 숙제를 하고 있었다. 호롱불 밑에서...그런데 아버님이 술을 한잔 건하게 드시고 오셨다. 아버님은 우리보고 자기이름을 써보라고 하셨다. 몇몇 친구들은 열심히 썼다. 그런데 달성이는 이름을 ‘이달17’이라고 썼다. 왜 이 친구가 이달17 이라고 썼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본인도 모른다. 그래서 이친구의 별명은 ‘이달17’이 됐다. 지금도 이친구의 이름이 헷갈린다. ‘이달성’ 인지 ‘이달선’인지.....아~~~추억이다.
달성이는 콘도에서 수영강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경포대 해수욕장 부근에 있었는데 우리는 달성이가 잡아준 콘도에서 숙박을 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술을 엄청 먹었다. 나랑 6촌 관계인 ‘인자’ 하고....얼마를 먹었는지 모른다. 아침 해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콘도로 들어갔다. 신부는 잠자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잤다.
얼마 후 깨어났는데 아뿔싸! 지갑을 모래바닥에 놓고 온 모양이다. 그래서 다시 나가서 집사람과 한참을 찾았다. 당연히 없었다. 지갑에는 친구들이 챙겨준 결혼 축하금이 70만원 가까이 있었다. 나는 이 돈을 비자금으로 하려고 숨겼던 것이다. 그런데 없어졌다. 잃어 버렸다 생각하고 차를 몰고 대관령 휴게소에까지 왔다. 배가 고파 라면을 먹는데 이 사람이 지갑을 주는 것이다. 얼마나 반갑던지....결국 압수당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달콤한 신혼여행은 끝났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삶의 터전으로 돌아갔다. 집사람은 7월쯤에 출퇴근용으로 티코를 샀다. 나는 집사람은 절대로 운전을 못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목마른 놈이 우물 판가고 했던가? 화천은 시골이라 근무지가 집에서 멀었다. 차도 없고....그래서 운전면허를 따고 티코를 샀다고 했다. 불가사의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7월이 넘어서면서 한청협에서 나 보고 일본 ‘원자폭탄수소폭탄금지 세계대회(원수금대회)’에 한청협을 대표해서 가라고 했다. 난 당시 한청협 반핵특별위원장(?)으로 임명 됐다. 난생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는 것이었다. 비자를 발급받고 떠날 준비를 했다. 8월초니까 얼마나 더웠겠나? 지역에서는 8.15 범민족대회 준비가 한창 이었다. 전국연합으로 부터 범민족대회 신문이 천일화물로 보냈으니 찾으라고 했다. 당시 집사람은 운전이 서툴렀다. 그래서 나는 티코를 내가 끌고 다니겠다고 했다. 주말에 화천으로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허락해 주었다. 나는 집사람 티코를 몰고 가서 찾아왔다. 다음날 이면 일본으로 출국을 해야 했다.
새벽이었다. 전화가 왔다. 경찰이 민청 사무실을 압수수색 했다는 것이다. 내가 범민족대회 신문을 민청 사무실에 보관해서 덮친 모양이다. 경찰은 이 신문을 이적표현물로 지목했다. 그래서 이적표현물 수령, 운반, 보관이 된다는 것이다. 사무실에 나가니 어지럽혀져 있었다. 나는 출국시간이 돼 공항으로 나갔다. 출국하는데 이상했다. 어~ 임종석이 전화번호도 있네~ 그러면서도 내보내 주었다.
일본에 도착했다. 원수금 대회는 일본에서는 꽤 이름 있는 반핵단체가 주최하는 대회였다. 당시 일본에는 사회당 무라야마 총리가 들어서서 반핵 운동이 한창 일어나고 있었다.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탔다. 이륙하는데 가슴이 출렁했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비행기가 이륙할 때부터 착륙 할 때까지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일부러 비행기내 화장실에도 가봤다.
동경에 도착하니까 마중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재일교포였다. 한청협은 92년부터인가? 재일 동포청년 단체와 민족학교 책보내기 운동을 하면서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곧 바로 나를 초대한 일본의 원수금대회 조직위원들과 만났다. 어려운 가운데서 방문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다음날 나는 히로시마로 갔다. 원폭이 투하된 후의 히로시마의 모습을 보았다. 히로시마 돔 앞에 넓은광장에서 'NO MORE'라고 쓰인 깃발이 나부끼는 가운데 일본 총리가 참석한 행사였다. 원폭피해 기념관도 둘러보았다. 세계 13개국의 대표들이 초청돼 왔다. 유럽의회 의원도 있었다. 수십 개의 토론회가 열렸다.
나는 어떤 토론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해 일제의 조선침략 만행과 분단의 원인 제공에 대해 발표했다. 기억에 ‘지금 이 자리에도 우리의 동포가 있으나 분단돼 서로 만나지도 못한다. 이것이 일본의 책임이다.’ 라는 연설을 했던 기억이 있다. 통역해주던 사람은 재일교포 청년이었다. 이 사람을 나는 나중에 평양 갔을 때 만났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 이들은 모국방문단을 이루어 서울에도 왔다. 서울에서도 만났다. 엄청 반가웠다. 지금은 만날 수 없다. 전쟁의 먹구름이 나의 조국 하늘을 휘 감는다. 주여! 부디 굽어 살피사 전쟁 없는 나라가 되게 해 주소서~~~
그리고 나가사키에 갔다. 똑 같은 행사를 했다. 중간에 오사카에 갔다. 일본에 있는 동포들이 모여서 범민족대회를 치루고 있었다. 눈물이 났다. 같은 동포들이 이역만리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행사를 하고 있었다. 떠나오기 전날 호텔에서 헤어지는 청년들과 엄청 울었던 기억이 있다.
8월 10일 귀국길에 올랐다.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심사대에 왔는데 처음 보는 사람들이 왔다. 나를 잡았다. 그리고는 가방을 검사했다. 옆에서 하는 말이 ‘저 새끼 빨갱이래!’ 가슴이 철렁했다. 이제 죽는구나! 안기부에 끌려가는구나! 이렇게 해서 나는 재일동포 만난 간첩이 되는구나! 집사람은? 이제 결혼 한지 두 달밖에 안됐는데....
어쩌지?
[나의 인생살이 51
다시 감옥으로~~~ 이범영을 잃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일본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간첩으로 조작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정신 똑 바로 차려야 했다. 당시에는 일본과 연결된 반국가단체 구성 사건이 몇 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입국심사대를 지났다. 그런데 저쪽에서 어떤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눈에 확 들어왔다. 어디서 많이 본 사람들이다. 청주경찰서 정보과 형사들 이었다. 너무 반가웠다. 이들은 바로 체포영장을 보여주고 미란다원칙을 말하고 수갑을 채웠다. 순간 긴장이 확 풀렸다.
공항에는 한청협 본부에서 원식이가 마중 나와 있었다. 나는 보지 못했다. 내가 출국하기 전 집사람이 서울에 왔는데 만희형이 농담으로 감옥갈 수 있다고 했다.... 사실이 됐다. 만희 형은 그 뒤로 이 말을 잊지 않고 항상 미안해했다. 홍만희! 의리의 사나이다. 나는 만희 형을 좋아한다.
경찰 차량에 올랐다. 수갑 찬 손 위로 흰 수건을 감쌌다. 차가 올림픽대로를 달리고 있을 때 쯤 나는 그들한테 물었다. 뭣 때문에 이러시오? 그랬더니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이 박의장 말 잘해야 되요. 안 그러면 큰일 납니다. 나는 뭔지 모르고 그렇게 청주경찰서 유치장으로 슛 골인 했다. 밖에서는 청주민청 회원들이 와서 박영호 석방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때부터 지루한 조사가 시작 됐다.
조사내용은 범민족대회 신문을 찾아온 상황과 청주민청에서 발간한 각종 소식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내용이 이적표현물이란다. 자주민주통일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 북한의 주장과 같다고 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나의 주장을 했다. 그러더니 다음날부터 이상한 문건을 꺼내 놓고 조사하기 시작했다. 북한 관련 각종 유인물 이었다. 나는 알 길이 없었다. 나는 정말 몰랐다. 그런데 우리 사무실에 있던 후배가 어디서 구했는지 그것을 자기의 책상 서랍에 넣어 놓았던 것이다. 이것을 내가 출국하기 전날 사무실 압수수색을 하면서 가져갔던 것이다.
경찰과 검찰의 주장은 내가 사무실 관리 책임자 이고, 북한관련 문건이 나왔으니 나보고 책임지라는 것이었다. 나는 범민족대회 신문과 청주민청 발행 소식지는 내가 책임지지만 그 문건은 보지도 못 했다며 책임질 수 없다고 했다. 만약 같은 자취방에 두 사람이 책상을 쓰는데 내 책상에서 나오지 않은 물건을 내가 방값 낸다고 나보고 책임지라하면 되냐고 따졌다. 나중에 후배가 검거되고 나서 나는 그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수감된 지 3일인가 지났는데 아침에 신문 봤다. 이범영 사망! 이라는 소식이 실렸다. 면회 온 청주민청 회원들로 부터도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 이 땅의 키 큰 나무 이범영은 그렇게 가는가! 엄청 울었다. 조사도 안 받는다고 했다. 경찰도 그날만은 양해해 주었다. 청년운동을 오늘에 이르게 한 사람이다. 수 없이 도망 다니고, 구속되고....
범영이 형은 그렇게 가셨다. 나는 범영이 형이 가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장례식도 보지 못하고 그렇게 범영이 형은 나랑 헤어졌다. 내가 출감하고 나서 범영이 형을 만나고자 했을 때는 모란공원에 덩그러니 사진 한 장뿐이었다. 이창복 의장님도 구속되셨다. 원주의 김진희 회장도 구속됐다. 94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검찰은 북한 관련 문건까지 해서 총 120여 가지의 증거물로 나를 기소했다. 집사람은 아무 영문도 모르고 면회 왔다. 울지도 않았다. 내가 이런 일을 하면 당연히 구속될 것을 알고 있었던 듯 그렇게 담담하게 면회하고 갔다. 내심 서운했다. 신랑이 감옥 갔는데 울지도 않고....집사람은 토요일 날 직장을 마치고 청주로 와서 저녁 마지막 타임에 나를 면회하고 시집에서 잠자고 다음날 다시 면회하고 화천으로 올라갔다. 그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겠는가? 생각하면 가슴이 찡했다.
어머니도 면회 오고 아버님도 면회 오셨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두 번째 구속돼 감옥살이를 했다. 8월이라 엄청 더웠다. 청주교도소 교도관들은 또 왔어? 하는 분위기였다. 나랑 여러모로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3사 상층 7방에 수감 됐다. 들어가니 독방 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도소에서 방이 너무 없으니 교특(교통사고)으로 들어온 사람들과 합방을 하면 어떠냐고 했다. 당근 땡큐! 그래서 나까지 6명이 함께 지냈다. 심심했는데 잘 되었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모두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다가 잠시의 실수로 사고를 내고 합의금이 없어서 감옥에 온 사람들이다. 함께 웃으며 즐겁게 지냈다. 그중에 80년 1공수부대 출신인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80년 광주학살 때 광주에 파견 나갔다고 했다.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양심을 가지고 살자고 했다. 어떤 사람은 고향이 전라도 쪽인데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다. 잘할 것 같다고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1심 재판이 시작 됐다. 검찰의 인정신문이 끝나고 부터 2주에 한 번씩 재판을 하는데 심문이 끝나서 결심하고 구형만 남겨 두었다. 그런데 재판정에 나가면 공소장 변경을 했다. 이렇게 해서 6번인가 공판 없이 공소장 변경만 했다. 나를 괴롭히려고 한 것 같았다. 1심은 6개월 인데 꼬박 채웠다. 일본에서는 내가 구속됐다고 석방요구 집회도 개최 됐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재판을 받을 때 방청도 오고, 그리고 석방되는 날 함께 하기도 했다.
검찰은 징역 2년에 자격정지 3년을 구형하고 판사는 징역 1년 6월에 자격정지 2년을 언도했다. 당연히 항소 했다. 또다시 지루한 재판이 시작됐다. 집사람과는 매일 편지로 대화했다. ‘내가 아침에 눈을 떠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네~~’하는 노래 가사가 그렇게 맘에 와 닿았다.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비행기가 떨어지고, 기차가 탈선하고 김영삼 정권이 천벌을 받은 모양이다.
다시 지겨운 2심 재판이 시작됐다. 그때쯤 해서 유인물을 보관하고 있었던 후배가 체포 됐다. 나는 그 책임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2심에서는 범민족대회 신문 수령, 이동, 보관과 청주민청 하계수련회 자료집 제작, 각종집회 개최 혐의로 국가보안법 7조 1, 3항 및 집시법을 적용받아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언도 받았다. 내가 석방된 것은 95년 5월쯤 이었다. 거의 10개월 여 만이다. 구속자 최장 재판 기일이 10개월 이니까 만기 채웠다.
얼마 만에 안아보는 사랑인가? 집사람을 껴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렇게 우리의 사랑은 더 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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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박영호의 부친 |
[나의 인생살이 52
새로운 길을 가고 싶었다. 아내가 임신하다.
난생 첫 해외방문인 일본여행은 나에게 많은 고민을 던져 주는 계기가 됐다. 일본에서 행사를 하고 외국인들과 뒤풀이를 하는데 도통 말이 통하지 않았다. 영어를 할 줄 알아야 무슨 말을 하지! what do you think about korea peninsula reunification 이렇게 질문하고 나는 가만히 들어 본다. 그들의 대답은 좋다는 거였다. 나머지는 내 생각대로 해석한다. 아마도 내가 영어를 할 줄 알았다면 더 많은 대화를 통해서 참석한 각국의 대표들과 친분도 더 쌓았을 것이고 한반도 통일에 대해서도 많은 공감을 얻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나는 한반도의 통일을 영어로 애기할 때 꼭 reunification ...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통일부를 Ministry of National Unification 으로 표기 한다. 통일이 옳은가? 아니면 재통일이 옳은가? 원래 우리는 하나의 민족국가 이었는데 즉, 통일이 됐었는데 분단됐으니까 재통일을 해야 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감옥에서 영어를 공부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동안 일상적 투쟁에만 매몰되어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됐던 것이다. 공부가 절실히 필요 했다. 알아야 면장도 하지! 무식은 진보가 아니었다.
그래서 감옥에서 오랜만에 많은 책을 읽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공부가 잘 되지 않았다. 나는 출감하면 ‘통일정책네트워크’라는 연구소를 차리고 싶었다. 민족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통일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87년 민주화 운동 이후에는 통일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던 거 같다. 88년 남북학생회담 대표가 그 짐이 됐다.
92년 초 미국으로 유학 떠났던 막내 동생이 95년 초에 귀국했다. 5월에 출감하고 나서 동생을 만났다. 무척 반가웠다. 동생은 비행조종 관련 자격증을 6개나 땄단다. 그래서 아시아나항공에 시험을 봤다. 비행조종사 자격증은 비행시간으로 주어지는데 최소 10시간의 점보비행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한 시간에 약 3천만 원 든다고 했다. 그래서 총 3억 원이 드는데 이를 혼자서 할 수 없기 때문에 일단 항공사에 취직을 하고 해당 항공사의 조종사가 된다는 조건하에 항공사에서 투자하는 것으로 되는 모양이었다. 동생은 2,000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했다. 너무 좋았다. 나는 동생한테 말했다. 단 하루를 근무하더라도 아시아나 항공사에 들어갔다 나와라.......
어느 날 동생이 비행기 조종석의 브로마이드를 보여주며 이렇게 한다고 하면서 설명해 주기도 했다. 랜딩 할 때는 순전히 감으로 한다고 했다. 원, 투, 쓰리, 랜딩~~~~이렇게 한단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비행기를 타고 착륙안내 방송이 나오면 마치 내가 조종사 인양 속으로 랜딩 카운트를 한다. 편하다. 그렇게 합격한 동생은 결국 내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돼 비행조종사가 되지 못했다. 아쉽다.
막상 감옥에서 나오니 지역의 사정은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감옥에서의 계획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됐다. 내가 95년 감옥에서 나오니 바로 지방선거가 시작됐다. 민청을 같이 하던 선배가 당시에 이기택씨가 이끌던 민주당 충북도당에 근무했는데 나 보고 도의원에 나가보라고 했다. 나는 싫다고 했다. 도시산업선교회 정진동 목사님이 청주시장에 나오신 것이다. 그래서 청주민청 차원에서 지지하기로 했다.
정진동 목사님은 청주에서 노동자, 농민, 서민의 고통을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신 분이다. 청주시장이 돼 일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나도 지원에 나섰다. 하지만 떨어졌다. 서민을 위해서 일했다고 서민들이 찍어주는 것은 아니었다. 야속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목사님은 그렇게 노동자 농민들과 함께 한 평생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추모의 마음을 깊이 가지고 있다.
감옥에서 나와 처갓집에 머물고 있던 아내를 만나러 갔다. 당시 장모님은 내가 일본에서 일이 있어서 오래 체류한 줄로 알고 있었다. 10개월 만에 마누라를 보니까 조금은 서먹서먹했다. 그런데 새벽쯤엔가 꿈을 꾸었다. 바닷가에서 엄청 큰 조개를 내가 주웠다. 그 뒤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태몽이었다. 감옥에서 운동 열심히 하고 나왔으니 건강은 끝내 주었다.
얼마 후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무 좋았다. 한편으로 기분이 묘했다. 내가 아빠가 된다는 것이.....이듬해 1월 청주에서 나는 예쁜 공주를 맞았다. 집사람은 티코를 끌고 출퇴근 하고 있었다. 신기했다. 그 뒤로 나는 엄청 편했다. 역시 운전은 마누라가 해야 한다. 한 잔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집사람은 더 이상은 흩어져서 살지 않겠다고 했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때 우리 어머니는 내가 출감하면 살라고 청주 용암동에 임대아파트를 마련해 두었다. 그런데 집사람이 강원도 지방공원이라 충북으로 도간 이동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인연이라는 것은 우리를 따라 다녔다. 장인이 화천군청에서 과장을 하실 때 같이 근무 했던 사람이 당시 내무부에 근무 했단다. 집사람은 그 분한테 전화해서 부탁을 한 모양이다. 그래서 충북으로 발령이 났다.
그런데 충북에서는 청주로 발령을 내 줄 수 없다고 했다. 청주에는 여자를 받지 않는다고 했단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충주로 발령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결혼하고 근 1년 만인 95년 6월쯤에 청주 용암동에 있는 임대아파트에 둥지를 틀었다. 결혼하면서 숟가락 하나 사지 않았다. 결혼식만 딸랑하고 각자의 집에서 살다가 감옥가고...결혼 한지 1년 만에 우리의 신혼집이 생긴 것이다. 나는 돈이 없으니 집사람이 빚을 내서 살림을 마련했다. 그리고 청주에서 충주시의 어느 동사무소에 출근했다.
집사람이 임신 중이어서 나는 아침마다 티코로 충주에 있는 동사무소까지 데려다 주었다. 겨울 어느 날 충주로 데려다 주다가 증평쯤에서 큰 사고가 날 뻔 했다. 티코가 눈길에 미끄러져 두 바퀴를 돌았다. 다행히 무사했다. 아침에 데려다 주고 다시 청주로 와서 민청과 충북연합 사무실에서 일하고 저녁 퇴근시간이 돼서 다시 충주로 데리러 갔다. 나는 하여튼 운전에는 자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흥국생명 소장 일을 하던, 지금은 해직교수가 된 승희 형이 충주로 발령이 나서 집사람을 데리고 다녔다. 승희 형은 민청 회원이었다. 감사합니다.
▲ 필자 박영호의 어머님
[나의 인생살이 53
공주님이 태어났다.
95년은 해방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전국적으로 통일희년을 선포하고 엄청 크게 민족해방 기념행사와 통일 행사를 진행했다. 하루는 회의를 마치고 밤늦게 티코를 타고 용암동 집으로 가는데 충북대 후문 쪽에서 앞서가는 차가 음주를 했는지 비틀거리면서 가고 있었다. 틀림없는 음주차량이었다. 나는 조심해서 따라가다가 조금 틈이 나기에 추월을 했다.
집 앞에 거의 다 왔는데 신호등에 걸렸다. 그냥 갈까 했는데 앞쪽에서 사고가 나서 경찰이 사고 조사를 하고 있었다. 신호대기 상태인데 갑자기 뒤에서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잠시 기절 했다. 정신을 차리니 아까 본 음주 차량이었다. 뒤를 보니까 운전석에서 서로 자리를 바꾸고 있었다. 경찰이 달려왔다. 음주측정을 하니까 역시 음주였다.
나는 그길로 병원에 갔다. 다음날 아침에 어떤 사람이 와서 사과를 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얼마 전 뺑소니로 면허가 취소 됐는데 여자 친구와 술을 한잔하고 자기가 대신 운전하다가 사고를 냈다며 울먹였다. 나는 가슴이 찡했다. 감옥에 있을 때 교특(교통사고)으로 들어온 사람들과 있어봐서 사정을 대충 이해는 했다. 그는 자기가 충북대 졸업생인데 나를 안다고 했다.
갑자기 동정심이 발동 됐다. 그래서 나는 병원에서 일어나서 경찰서에 갔다. 잘 아는 후배인데 나는 다친 거 없다. 그리고 자동차도 크게 다친 거 없다. 그러니 최대한 선처해 달라고 했다. 사실 티고 수리비가 560만원 나왔으니 패차 수준이었다. 그 뒤로 이 친구는 경미한 접촉사고로 벌금형에 처해졌다고 소식을 전해 왔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는 구속 됐을 것이다. 어디에 살든 잘 살길 바란다.
감옥에서 나오니 충북연합은 조직이 와해 상태였다. 충북연합은 지역의 또 다른 단체들과 연대해서 충북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 라는 조직으로 발전돼 있었다. 이 단체 이름으로 전국연합에 다시 가입 했다. 나는 그 조직에서도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근태가 지키고 있다가 구속되고 잠시 후삼이가 지키기도 했다. 후삼이는 감옥 갔다 와서 어려워진 충북연합을 살려보려고 상근 실무자가 됐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바람과 같이 사라졌다. 이후 영구와 정호가 지켰다. 정호는 내가 대학 2학년 때, 그러니까 정호가 대학 들어와서 곧 바로 나와 같이 학습을 하던 그런 후배다. 한국사상연구회라는 동아리에서 만났다. 내가 어려울 때 항상 나와 함께 했다.
가을이 됐다. 역사바로세우기 일환으로 청주의 3.1 공원에 있던 정춘수 동상 철거 운동이 시작 됐다. 정춘수는 원래 목사로써 독립선언문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기독교를 대표해서 서명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중에 친일파로 돌아섰고 해방 후에는 반민특위에 체포되기도 한 사람인데, 청주 우암산 언저리에는 3.1 공원이 있는데 여기에다가 충북 출신의 민족대표 6인을 모시고 동상을 세웠는데 거기에 친일파 정춘수 동상이 있었다.
충북역사실천협의회에서는 정춘수 동상은 있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고 이것을 내가 집행위원장으로 있던 충북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가 받아 들였던 것이다. 특히 해방 50주년을 맞이하는 시기이기에 의미는 일이었다. 서명운동도 하고 해서 시민들의 참여 열기가 상당히 좋았다. 내 생각에는 동상 철거운동을 잘 조직해서 침체된 지역의 민족민주운동을 다시 살리고자 하는 소망도 있었다.
95년 내가 감옥에서 나오니까 선배가 당구장을 하고 있었는데 사주팔자를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나를 보자고 했다. 갔더니 나의 이름과 사주를 풀이해 주었다. 재관쌍미격 이라고 했다. 상당히 좋단다. 나중에 뭘 할 것이라고 했다. 기분은 좋았다. 김동완 교수님이다. 나는 그 형을 전대협 동우회 행사장에도 모시고 갔다. 동우회 회원들이 좋아 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내 놓으라 하는 역학 전문가가 돼있다.
96년 1월 13일 사랑하는 공주가 태어났다. 나는 동완이 형한테 우리 딸 이름을 지어주라고 했다. 이름을 예린 이라고 지었다. 나중에 집사람이 은서로 바꾸었다. 지금은 고2 다. 은서라는 이름도 그 형이 지어 주었다.
그런 와중에 나는 2월 8일 동경 2.8 독립선언문 낭독일 을 기념해서 정춘수 동상을 철거하겠다고 청주시청에 통보했다. 경찰이 동원됐지만 막지 않았다. 청주시장이 공무원들을 동원해서 막았다. 그날 유홍준 교수를 비롯해서 많은 역사관련 인사들이 참석했다. 언론에서도 대대적인 취재를 했다. PD수첩에서 그 전날에 정춘수 손자와 나를 인터뷰도 했다. 나는 동상 철거를 위한 준비물을 직접 샀다. 광목과 밧줄을 준비 했다. 그리고 집회를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오늘은 형식을 취하고 다가오는 3.1절에 다시 행사를 해서 시민들의 참여를 더 높여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광목으로 정춘수 동상을 휘감았다. 목에 밧줄도 걸었다. 당기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나는 기다리라고 했다. 하지만 일부 과격한 사람들이 그냥 당겨버렸다. 아쉬웠다. 화도 났다. 대중운동에서 과격성은 금물이다. 오히려 역풍이 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운동은 대중과 함께 해야 한다. 대중이 이해 할 수 있는 만큼에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된다. 그런데 냉큼 당긴 것이다.
이것을 당긴 사람들은 내가 없는 사이 지역에서 운동적 영역을 넓히려고 하던 사람들 이었다. 다음 날 부터 조선일보 사설에는 ‘청주에 법이 없던 날’ 이라는 글이 실렸다. 그리고 한 번 더 실었다. 아마도 친일파 정춘수 동상철거에 대해 조선일보가 두 번의 사설을 실은걸 보니까 조선일보는 친일파 신문이 맞다.
우리는 경찰에 자진 출두 했다. 나와 도종환 선생님(현 국회의원), 정진동 목사님 등이었다. 재판에서 우리는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 받았다. 현주건조물 파괴 죄라고 했다. 친일파 동상도 건들면 안 된다는 논리였다. 지금은 청주 3.1공원에 가면 동상의 좌대만 남아있고 거기에는 시민단체에 의해서 철거됐다는 표시가 돼있다. 내가 한 것이다.
우리는 항의 하는 차원에서 항소를 포기했다. 나는 95년에 출감 하면서 국가보안법에 대해 대법원에 상고한 상태였다. 그래서 94년 감옥 갔던 것이 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만약 내가 상고하지 않았다면 나는 집행유예 기간에 또 범죄를 저지른, 이를테면 누범기간 이어서 아마도 또다시 엄청 징역을 오래 살았을 것이다. 정춘수 동상 철거사건의 판결이 확정되고 난 후에 대법원에서는 국가보안법에 대한 나의 상고를 이유 없음으로 해서 기각 했다. 그래서 나는 보기 드문 쌍집행유예 상태에 있게 됐다.
민청과 충북연합은 95년에 우암동 시절을 정리하고 사창동으로 이사를 했다. 민청은 사무실을 작은 도서관으로 꾸몄다. 충북연합은 내가 감옥가고 나서 지역의 또 다른 단체들과 함께 충북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라는 조직으로 확대 됐다. 역시 내가 집행위원장을 했다. 민청 옆방에 사무실이 있었다. 나는 96년 초 청주민청 총회를 통해 청주민청의 의장직을 그만 두었다. 이광희 동지가 민청 의장을 맡았다. 참 오래도 했다. 89년 가을에 맡아서 96년 초에 그만 두었으니 5년 6개월 동안 한 것이다......시원섭섭했다. 나는 충북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 집행위원장만 했다. 훨씬 수월했다.
96년 2월쯤에 집사람 친구, 즉 89년 교원대에서 만났던 후배 호준이와 미화가 충북에서 부부교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내수에 아파트를 얻어서 이사를 하니 우리도 그 옆으로 이사를 하라고 했다. 전세 보증금은 후배들이 대신 내주겠다고 했다. 고마웠다. 당시 은서가 태어나서 13평 아파트가 좁았다. 그리고 충주까지 출퇴근 하는데 너무 시간이 많이 걸려서 집사람이 힘들어 했다. 우리는 용암동에서 내수 쪽으로 이사를 했다. 집사람 출퇴근이 수월했다. 은서가 백일이 지나고 집사람이 충주로 출근하면서 나는 은서를 데리고 사무실로 출근했다.
96년에는 지역의 언론사인 충청일보가 안기부 출신의 사람을 사장으로 임명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는 노조를 해산하고 노조원들을 해고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언노련에서 와서 함께 투쟁했다. 나는 집회에 나갈 때 100일이 갖 지난 은서를 안고 나갔다. 은서를 가슴에 안고 운전석에 앉아 젖꼭지 물리고 운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하다. 그러면 정보과 형사들이 은서를 받아 준다. 집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씻기다 보면 어디선가 돈이 만 원짜리가 나온다 형사들이 준 모양이다.
▲ 96년 2월 8일 청주 3.1공원내 친일파 정춘수 동상이 내려지고 있다.
[나의 인생살이 54
참 힘드네~~~
운동의 형태도 많이 바뀌었다. 전위적 운동에서 대중운동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운동이 전문화되기 시작했다. 더 이상 투쟁만을 목적으로 하는 운동은 자리 잡기 어려웠다. 민족민주 운동에서 시민사회 운동의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었다.
97년 초 우리는 다시 충주로 이사를 했다. 집사람이 출퇴근이 너무 힘들다고 했다. 나는 다시 청주로 출퇴근 했다. 97년은 대선을 앞두고 있어서 민족민주운동 진영에서는 또다시 대선방침 논쟁에 휘말렸다. 한청협과 전국연합은 대선후보를 내기로 결정했다.
충주로 이사를 했는데도 집사람은 무척 힘들어 했다. 그래서 다시 집사람 직장이 있는 충주KBS뒤에 있는 아파트로 다시 이사를 했다. 그리고 한 번 더 이사를 했다. 결혼하고 2년... 만에 네 번째 이사였다. 치과를 운영하는 선배가 보증을 서주어 전세금을 은행에서 빌릴 수 있었다. 충주로 이사를 해서 처음에는 잘 지냈다. 집사람은 출근하는 동사무실이 가까워 좋아 했다. 집사람이 출근하면 나는 은서를 데리고 청주로 출퇴근 했다. 티코에 몸을 싣고 젓꼭지 물려서 한 손으로는 운전하고...지금 생각해보면 미친 짓이다. 사고 나면 어쩌라고.....
은서가 조금 커지면서 충주에 있는 전교조 선생님들과 공동육아 집을 만들어서 거기에 보냈다. 나는 특별히 버는 돈이 없었다. 집사람이 받는 공무원 9급 월급으로 버텼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월간 말’지 판매도 했다. 하지만 돈이 되지 않았다. 청주로 출퇴근하는 차비도 나오지 않았다. 건대 병원 노조에 유자차를 납품하기도 했다.
집사람은 동사무실에서 주민등록 등. 초본 발급 업무를 봤다. 민원인들과 부딪히는 일이라 무척 힘들어 했다. 한 번은 충주의 어느 동사무소에 근무하는 사람이 인감을 잘못 발급해 300억 원의 구상권 청구를 받았다고 하면서 그만 두어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충주에는 아는 사람도 없고, 신랑은 늦게 오고, 술 먹고 안 들어오기도 하고, 한청협, 전국연합 회의하러 전국으로 다니고...무척 힘들었던 모양이다. 점차로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짜증을 내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고 돈 벌러 갈까 했다. 그러면 집사람은 내가 언제 그만두라 했냐고 화를 냈다. 현실과 이상이 맞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몰랐다. 이미 방향감각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는 언제부터인가 뭔가가 둘이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어느 날은 퇴근하고 맥주를 한 잔 먹고는 울기도 하고, 웃으며 대화하다 보면 어느새 서로를 헐뜯기도 하고....점차로 우리 부부사이에 이상 징후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사랑은 간데없고 현실만 남는구나!!!
97년 대선이 가까워 오면서 한청협은 대선후보 전술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회의에 꼭 가고 싶었다. 내 생각에는 우리 후보를 내되 적당한 시점에서 사퇴를 하고 민주진영 단일후보를 밀어서 공동의 정부를 구성하는 문제를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조직, 즉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당을 만들어 민족민주운동의 정치세력을 확대 하는 속에서 후보전술은 다양하게 쓰면 된다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내가 생각한 것은 이것이었다.
어느 날 눈이 충주에 눈이 엄청 많이 왔다. 한청협에서 이러한 문제를 놓고 중요한 회의가 소집된 것이다. 나는 당시 한청협 본부의 특별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나는 티코를 몰았다. 하지만 충주 주덕쯤에서 차를 돌려야 했다. 그래서 만들어 진 것이 국민승리 21 이다. 당시 한청협, 전국연합의 결정으로 전국의 한청협 지역조직들이 거의가 다 국민승리 21 지구당 역할을 했다.
나의 생각은 전국연합이 민주연합을 위해 민주연합 의향이 확실한 사람을 대선후보로 내세워야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국연합에서는 논의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독자후보를 통해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세력이 더 많았던 모양이다. 결국 권영길씨를 독자후보로 해 선거는 치러졌다. 30만6천표(1.19%)를 얻고 낙선했다.
IMF가 들이 닥쳤다.
[나의 인생살이 55
아들 상현이가 태어났다.
대선은 김대중 후보와 이회창, 이인제, 권영길 등이 붙었다. 김대중 후보는 김종필과 공동정부 구성을 합의하고 선거에 임했다. IMF 위기에 대한 국민적 실망과 이회창 후보의 아들 병역 문제, 그리고 소위 말하는 호충연합 등등의 이유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해방 후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가 일어난 것이다. 얼마나 고생했는가? 김대중 후보 개인의 영광이기도 하지만 우리 민족의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리는 순간 이었다.
97년 대선이 한창 진행될 때였다. 집사람은 둘째를 임신해 고생을 많이 했다. 신랑은 돈도 안 벌고 재야운동 한다고 뛰어 다니고, 기억에 당시 9급 공무원 월급이 70만 원 정도 됐던 거 같다. 나는 지금까지 집사람 월급통장을 본 일이 없어서 얼마를 받는지 알 수 없었다. 가끔 집사람이 울었던 것도 이런 스트레스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것이 소위 말하는 임신 우울증이었다. 나는 몰랐다. 나는 대선이 끝나면 이제는 가족도 돌보면서 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인지 집사람의 고통을 등한시 했다. 나는 가끔 짜증도 부렸다.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러면 안됐지만 나도 환장할 일이었다. 책임을 지고 있으니 그 일은 마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가끔 말다툼도 했다. 함께 아파하지 못했다. 나도 어려우니 그냥 버티며 살자고 했다. 이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요즘말로 존버 였다.
나를 사랑해서 나만 믿고 결혼했는데 내가 책임져주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나는 지금 우리 집사람을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 지난 과거에 대해 조금이라도 보답해야 한다. 지금은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정국은 대선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데 나는 아들 출산을 위해 춘천으로 왔다. 집사람은 춘천에서 아이를 낳고 화천의 처가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기로 했다. 97년 11월 11일 오후 4시경 빼빼로 데이에 상현이는 재왕절개로 태어났다. 너무 좋았다. 몸도 약한 사람이 아이를 둘이나 낳느라고 고생도 많이 했다.
상현이가 태어나고 나는 딸아이를 데리고 친구 재휘네 집에 가서 한잠 자고 그날 밤을 새우려 했다. 오후 6시쯤으로 기억된다. 저녁을 먹으려고 하는데 전화가 왔다. 아이가 이상하니 빨리 오라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가보니 의사가 하는 말이 아이에게 보리차를 먹였는데 자꾸 토한다는 것이다. 까스도 안 나오고 배는 불러오고.....그러면서 지금 즉시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집사람을 병원에 남겨두고 나는 상현이를 품에 안고 한림대 병원으로 갔다. 검사가 시작됐다. 1차 진단은 선천성 거대결장 이란다. 대장의 끝부분에 연동세포가 없어서 대장 연동운동이 일어나지 않아 까스가 안 나오고 배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주여~~~~
나는 서울에 있는 친구한테 전화를 했다. 서울대 병원으로 가야하니 혹 서울대 병원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상현이를 내 차에 싣고서 엠블란스 대용으로 쌍라이트 켜고 비상등 켜서 서울대 병원으로 내 달렸다. 병원에 도착해 검사가 다시 시작됐다. 1차 진단이 맞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현이는 태어난 지 1주일 만에 서울대 어린이병원에서 배를 가르고 수술을 했다. 집사람은 퇴원해서 처가 집에서 산후조리를 했다. 내가 일을 하지 않고 있어서 천만 다행이었다. 이렇게 위로해 본다. 청주 어머니가 올라 오셨다. 온 집안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우리 집 종손인데....
나는 대선이고 뭐고 아무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상현이 병간호에 몰두 했다. 병원에서는 1차로 대장의 일부를 잘라내고 장을 배 밖으로 꺼내 놓고 6개월 후에 다시 대장을 직장과 연결하는 수술을 하면 거의 정상적으로 살 수 있다고 했다. 당시 IMF가 닥쳐서 나라는 난리가 났다. 나는 수술비 걱정에 밤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벌어 놓은 것이 없었다. 보험도 들어 놓지 못했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는가! 가장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무책임 할 수 있는가? 아무리 자책해봐야 이미 때는 늦었다. 다행히 전대협 1기 친구들이 모금을 해줬다. 감사한다.
대선이 끝나고 국민의 정부가 출범 했지만 나 하고는 먼 애기였다. 병원에서 아들 간호하는 것이 일이 됐다. 간이침대에서 어머니랑 같이 잤다. 얼마를 지나 집사람이 병원에 왔다. 우리는 둘이 껴안고 엄청 울었다. 가난한 집안에 제사 자주 돌아온다고....그렇게 해서 상현이는 약 한 달 입원 후에 퇴원하고 2차 수술을 기다렸다.
[나의 인생살이 56
주여! 상현이를 살려 주세요......
일차 수술을 마치고 퇴원해야 하는데 병원비가 부족했다. 전대협 친구들이 모금을 해줬다. 고마웠다. 그렇게 해서 상현이가 30여일 만에 1차 수술을 마치고 97년 12월 초에 충주 집으로 퇴원했다. 배에는 똥주머니를 차고 있다. 이것을 장루라고 한다. 집사람은 다시 출근했다. 나는 상현이를 간호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답답했다. 무얼 해야 하는지 아무 생각나지 않았다. 상현이가 2차 수술을 위해 98년 5월쯤 다시 서울대 병원에 입원을 했다. 이번 수술만 잘되면 다시는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됐다. 갓 태어난 상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방긋방긋 웃었다. 너무 귀여웠다. 말도 못하고 아빠가 올려놓은 수술대에서 그렇게 있었을 것이다.
똥주머니를 차고 있는 상현이를 목욕을 시키면 옆구리에서 똥이 뽀글뽀글 나온다. 욕조가 똥 바다가 된다. 나는 그 똥 바다가 너무 좋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곧 완치된다. 상현이가 2차 수술을 했다. 집사람은 휴가를 내고 올라왔다. 우리는 이번 수술만 끝나면 은서와 상현이를 잘 키우자고 기도 했다.
집사람은 주말에 충주에서 서울대 병원으로 올라왔다. 나는 어머니와 같이 상현이 간호를 정성껏 했다. 수술은 잘 됐다고 했다. 다시 수술비가 걱정 됐다. 이번에는 청주에서 함께 운동하던 동료들이 모금을 해 주었다. IMF시절이라 정말로 어려웠는데 모두들 십시일반으로 도와주었다. 너무너무 감사했다. 상현이가 퇴원하고 우리 네 식구는 오순도순 살았다.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고, 많은 사람들이 정치권으로 진출했다. 한편으로 국민의 정부는 IMF 극복을 위해 금 모으기 운동을 했다. 내 놓을 금도 없었다. 상현이 병원비를 위해 은서 백일이나 돌때 들어왔던 금을 모두 처분했기 때문이다.
대선이후 전국연합은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한청협 역시 마찬가지였다. 권영길 후보를 밀었는데 1.2%를 얻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민족민주운동의 진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비록 1.2%를 얻었지만 계속해서 독자적으로 정치세력화를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아직은 힘이 약하니 김대중 정부와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힘을 기르는 게 옳은지! 나는 한편으로는 자강론을, 한편으로는 연합론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5월쯤에 상현이는 1차 수술을 해 밖으로 꺼내 놓았던 대장을 다시 배 안으로 넣어 직장과 연결하는 2차 수술을 마쳤다. 약 보름 후 우리는 상현이를 데리고 퇴원했다. 이제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완치에 가까울 것이니 먹는 것만 잘 조절하면 된다고 했다. 안심하고 집으로 왔다.
그런데 수술하고 나면 완치에 가까울 것이라고 했던 상현이가 열이 많이 나고 다시 아팠다. 급하게 다시 서울대 병원으로 갔다. 다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아~~~태어나서 부터 수술하기 시작해서 이제 6개월 지났는데.....퇴원한지 15일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상현이는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3차 수술인 것이다. 98년 7월쯤 이다.
그런데 수술이 끝나고 상현이가 중환자실로 갔다고 불이 들어왔다. 수술 후 열이 너무 나서 일단 중환자실에서 예후를 보자는 것이었다. 1, 2차 수술 때는 바로 나와서 일반 병실로 갔는데 이번에는 중환자실이란다. 하루에 두 번 밖에 면회가 안 됐다.
나와 집사람은 서울대 병원교회에서 새벽기도를 했다. 주여! 제발 우리 상현이를 살려주세요.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났다. 집사람도 울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상현이는 점점 위험해 졌다. 오줌이 나오지 않았다. 하루는 면회를 가니까 온 몸이 돌덩이 같이 딱딱해지고 있었다. 오줌이 나오지 않으니 온 몸에 물이 차기 시작한 것이다. 담당의사는 매우 위험하다고 했다. 아마도 약한 몸에 잦은 수술로 병원 감염이 된 것 같았다. 폐혈증이라고 했다. 청색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동창으로 춘천에서 의사를 하고 있던 친구 정열이 한 테 물었다. 그랬더니 정말 위험 하다고 했다. 우리는 기도밖에 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오줌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살려주신 것이다. 온 집안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 것이다. 월드컵 축구 할 때였다. 간호사들이 상현이 볼에 태극기를 그려 놓았다. 상현이가 일어 날 것이라고 했다. 정말 기적같이 상현이는 근 보름 만에 방긋 웃으며 중환자실에서 나왔다.
3차 수술로 다시 배를 갈라서 1차 수술과 똑 같은 상태가 됐다. 역시 대장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병원에 집도 의를 바꿔달라고 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 퇴원했다. 98년 12월쯤에 다시 4차 수술을 또 했다. 꺼내 놓은 소장을 다시 대장과 연결해 집어넣고 배를 꿰맸다. 이번에는 잘 되겠지 했다.
집도의도 대한민국 최고의 권위자로 바뀌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99년 여름에 다시 5차 수술을 했다. 또 대장을 꺼내 놨다. 또 시간이 지나 2000년 겨울에 6차 수술을 했다. 또 소장과 연결하고 배를 꿰맸다. 내가 한청협 사무처장을 할 때도, 나중에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중앙당에 근무할 때도 계속해서 상현이는 수술을 했다.
2004년 여름쯤이다. 이번에는 철원으로 이사 간 집에 있는데 갑자기 상현이가 혈변을 누는 것이다. 얼굴이 하얗게 됐다. 둥쳐 업고 또다시 서울대로 갔다. 이번에는 장출혈이란다. 어디에서 출혈이 일어나는지 모른다고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과다출혈로 쇼크가 온다고 했다. 생사를 해 맨다. 몸이 약해 링거를 꼽을 수 없다. 가슴 쪽에 수혈을 위해 링거 줄을 꼽으러 가는데 상현이가 말한다. 아빠 나 살 수 있는 거지? 눈물이 앞을 가린다. 상현아 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빠가 살린다. 걱정하지 마라!!!
상현이는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장출혈이니까 이번에는 피를 쏟아 붓는다. 상현이 침대 앞에는 소생 실이 있다. 중환자실에 마지막으로 들렀다가 가는 곳이란다. 그곳에서 나가면 영영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나는 의도적으로 그곳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당시 총리실에 있던 친구가 서울대 병원의 어떤 의사를 잘 안다고 하기에 상현이 상태를 물어보았다. 그 친구는 나를 조용히 불렀다. 아마도 내일이 고비일 것 같으니까 집안 식구들을 대기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앞이 노랗게 변한다. 부모로써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축구 한 번 하지 못하고 상현이가 저렇게 누워있는 상태에서 내가 상현이를 안아보지도 못 한다면....
기도한다. 주여! 주여! 당신의 귀한 아들이 일어나게 해 주소서! 헌혈증이 수 십장 모아졌다. 그렇게 해서 상현이는 기적같이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상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어나 퇴원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2005년 여름에 7차 수술을 또 해야 했다. 또 소장을 꺼내 놨다. 시간이 지나 다시 2005년 겨울 8차 수술로 소장과 대장을 연결한다. 또 문제가 생겼다. 2009년 여름 9차 수술을 또 한다. 이번에는 대장을 또 꺼내 놓는다. 2010년 1월 10차 수술을 또 한다. 이번에는 아예 대장을 모두 잘라냈다. 그리고 다시 배를 꿰맨다.
그렇게 상현이는 중학교 1학년 때 까지 11년 동안 총 10차례의 대 수술을 했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제 다시는 수술 안 해도 되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소장이 수술부위 뱃가죽이랑 유착이 일어난 것이다. 어느 날 뱃가죽으로 똥물이 또 흘러 나왔다. 또 터진 것이다. 황급히 병원으로 또 갔다. 또 수술을 해야 한단다.
상현이는 수술 공포증에 시달렸다. 잠도 잘 자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상현이가 수술 할 수 있을 때 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앞으로도 최소한 두 번의 수술을 더 해야 한다. 지금도 상현이는 터진 뱃가죽에 똥주머니를 차고 학교 다닌다. 고등학교 1학년이다. 수시로 조퇴하고 온다. 나의 생활은 상현이와 함께 한다. 너무 기특하다. 나는 기도 한다.
상현이가 완쾌돼 나랑 축구하는 꿈을 꾸어 본다.
[나의 인생살이 57
전국조직의 사무처장이 되다. 한청협을 새로운 청년운동으로 전환하다.
상현이가 태어나서 병원생활을 하면서 98년 초쯤 나는 충북연대회의 집행위원장을 그만 두었다. 더 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정호가 그 뒤를 이었을 것이다. 98년 3월쯤 인가에 대선이후 전국연합 수련회가 속리산에서 있었는데 수련회 마치고 유기홍 의장이 충주의 우리 집에 찾아 왔다.
유기홍 의장은 대선 이후 한청협 의장을 그만 두고자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 보고 의장을 맡아서 하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할 수가 없었다. 당시 한청협은 대의원대회를 앞두고 있었다. 유기홍 의장이 다시 한청협 의장이 됐다.
대의원대회 이후 어느 날 상현이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종원이가 왔다. 나보고 한청협 사무처장을 맡아서 일해 달라고 했다. 종원이는 직전 사무처장 이었다. 황당했다. 지금 애가 아파서 병원에 있는데 어떻게 하냐고 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상현이는 2차 수술을 마치면 괜찮을 것 같았다. 또 당시에 상현이 병원 때문에 충북연대회의 일도 그만두었을 때였다. 나는 여러 가지 고민 끝에 사무처장을 맡기로 했다. 한청협이 다시 힘을 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한청협 사무처장이 되면서 대선 때 국민승리 21을 하면서 흐트러진 조직을 다시 추스르기 시작했다. 한청협은 대선 이후 국민승리 21에서 철수 했다. 권영길씨는 그 후 국민승리 21을 바탕으로 해서 민주노동당을 건설했다. 나중에 한청협의 발전적 해산을 반대하던 성남이나 울산 등의 청년단체들은 전국연합의 결정과 함께 2001년 이후 민주노동당에 조직적으로 참가한 모양이다. 지금의 통합진보당의 지도부를 형성하고 있다.
나는 한청협 사무처장이 되면서 전국을 돌아 다녔다. 대선을 거치면서 지역 조직이 많이 위축됐다. 특히 김대중 정부의 탄생으로 재야운동의 역할이 많이 축소됐다. 통일도 한다고 하고, 민주주의를 실천하겠다고 했으니 남는 것은 경제적인 문제만 남게 됐다.
유기홍(현 국회의원) 의장과 함께 정말 열심히 뛰었다. 98년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지역 회원들이 많았다. 나는 후원금을 거두어 만희 형과 종원이 하고 열심히 지원도 했다.
한편으로 한청협 바깥에 정치적 성격의 다양한 청년단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으니 재야에서 운동하던 사람들이 정치권에 진출하기 위해 우후죽순으로 청년단체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써클 형태의 다양한 청년단체들이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 졌던 것이다.
이미 94년에는 전대협 출신 우상호, 임종석 등이‘국제정보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의 바람직한 발전방향을 찾는 이념적 연구 써클로 건전한 사회운동으로 발전’할 것을 내세우며 '청년정보문화센터'를 조직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한청협은 이러한 청년세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로 하고 전국적인 새로운 청년운동체 건설에 대해 제안하고 나섰다.
그런데 한청협 내부가 이상했다. 소위 통일운동과 북한에 대한 의견차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전국연합 역시 똑 같은 문제에 봉착했다. 지역의 청년회들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대선이후 변화하는 정세에 맞게 지역에서 다양한 운동을 해야 했기 때문이고, 한편으로는 회원들이 나이가 들면서 지방자치선거에 참여하거나 청년운동을 마치고 자신들의 앞길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 또한 이러한 문제에 대해 공감하고 한청협을 하루속히 새로운 시대에 맞게 정비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한편으로 한청협 회원들 일부에서는 소위 북한민주화 운동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더욱 민족민주운동을 강화해야 한다는 사람들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 날 북한민주화운동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만들은 문건을 봤다. 이승만이가 건국의 아버지요, 박정희가 대한민국을 살린 사람이다. 뭐 이런 내용이었다. 소위 말하는 뉴라이트가 생기기 시작한 시기였다.
나는 미친 짓이라고 했다. 나는 이들과 싸워야 했다. 한편으로 성남, 울산 등의 단체들과는 북한에 대한 입장 차이와 청년운동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싸움을 해야 했다. 내가 중심을 잡지 않으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갈 것이 뻔했다. 일부 사람들은 한청협을 성남 등 한청협의 발전적 해산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넘겨주자고 했다. 나는 단호히 반대했다. 이것은 단지 조직을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방향과 관련된 투쟁의 문제였다. 잘못하면 내가 일구어온 운동의 성과가 엉뚱한 방향으로 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나는 이러한 논쟁은 결코 생산적이지 못하다고 봤다. 이미 갈 길이 달랐다. 한쪽은 반북운동이요, 한쪽은 민족민주운동 강화였으니 충돌은 뻔한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싸움이 우리 역사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봤다. 새로운 시대에 맞게 청년운동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운동도 대중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국민승리 21 이후 소위 재야 민족민주운동, 민중운동진영의 정당건설과 관련한 노선 투쟁도 격화 됐다. 그러니 얼마나 치열했겠는가?
우리는 한청협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전국청년단일조직을 건설하기로 했다. 재야운동으로의 청년운동과 정치조직 건설을 위한 조직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청년운동의 성격도 민족민주운동으로서의 청년운동이 아니라 시대에 맞게 해야 한다고 봤다. 다시 말해 청년세대의 이해를 반영하고 나아가 새로운 정권탄생에 따른 새로운 정치, 즉 복지나 경제민주화, 조세정책의 변화 등등을 반영하는 정치운동을 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중간 단계로 한국청년연맹을 건설하기로 했다.
한국청년연맹을 건설해서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청년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그래서 98년 9월 20일 대전 카농회관에서 우리는 전국대의원대회를 열어 한청협을 해산하고 그 물질적 정신적 자산을 한국청년연맹준비위원회로 이관하기로 했다.
한청협 해산 대의원대회에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다수결의 의결로 통과 됐다. 한청준비위는 전국연합에 가맹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나는 민족민주운동을 하는 조직을 떠나게 됐다. 이후 한국청년연맹 준비위원회는 청년정보문화센터, 전대협 출신 인사 등과 함께 1999년 3월 한국청년연합회(KYC) 준비위원회를 결성하면서 그 역사적 사명을 다 했다. 이후는 우리가 해왔던 청년운동은 KYC가 대표하게 됐다.
99년 초가 됐다. 어느 날 동대문의 기홍이 형 집에서 이승환 선배 나, 강기정(현 국회의원), 함운경 등과 만났다. 나는 그 자리에서 정치와 운동을 분리해서 정치할 사람은 정치하고 운동을 계속 할 사람은 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운경이 형이 한국청년연맹 준비위원장이 됐다. 나는 사무처장을 맡았다. 나는 운경이 형과 함께 한국청년연맹을 강화하고 여타의 청년단체와 새로운 청년조직을 건설하기로 했다. 과정에서 성남지역의 단체들과 엄청나게 싸웠다.
한청 준비위원회는 KYC(한국청년연합회) 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해산했다. 나는 이인영, 신동근 등과 함께 KYC 공동준비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KYC는 6월 12일 창립 됐다. 김형주(전 국회의원)가 단독으로 대표가 됐다. 나는 KYC 공동준비위원장을 끝으로 청년운동을 마치게 됐다. KYC는 전국연합에 가입하지 않았다. 지금도 KYC는 활발한 운동을 하고 있다. 다만 그 운동의 내용이 내가 생각했던 청년운동과는 조금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내가 떠난 조직이다. 아쉬움은 있지만 그들이 결정해서 나갈 일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한국민족민주운동의 집결체라고 했던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과도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됐다. 나는 어디로 가는가? 운동에서 멀어졌으니 나는 어디로 가는가? 한편 내가 청춘을 다 바쳐 일구었던 청주민청도 99년 7월쯤 엔가에 청주KYC로 재편되면서 발전적 해산을 했다. 내 뒤로 96년에는 이광희, 97-8년에는 김동진, 99년에는 상철이가 의장을 맡아 일했다. 상철이는 청주민청의 마지막 문지기가 됐다. 그래서 지금도 청주민청 동지회의 실무 따까리를 한다.
청주민청을 해산하는데 정말 마음이 아팠다. 함께 했던 동지들이 너무도 그립다. 지금도 만나고 있지만 일부의 사람들은 지금도 민족민주운동을 하고 있고, 정당으로는 나와 다른 당 활동을 하고 있다. 내가 그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지 못함에 안타깝기도 하다. 나는 그 동지들도 자신의 삶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인생살이 58
청주민쳥! 한청협! 영원히 잊지 못할 나의 청춘이여!
내가 학생운동을 마치고 나서 청주에서 지역운동에 뛰어들면서 청주민청에 쏟은 애정은 나의 청년시절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89년 8월 대학을 졸업하고 89년 10월쯤 25살에 청주민청 의장이 돼 95년 31살에 그만 두었다. 그리고 99년에 35살에 한청협을 끝으로 청년운동을 마쳤으니 정확히 10년을 했다. 과정에 충북지역의 민족민주운동을 책임져야 했고 전국 민족민주운동의 일원이 됐다. 돌아보면 꿈같은 세월이다. 93년 29살에 충북민족민주운동의 집행책임자가 됐다. 전국연합의 중앙집행위원이 돼 99년까지 했다. 그렇게 청춘을 다 바쳐 조국과 민족을 위해 나름 열심히 했다. 85년 시작한 학생운동까지 하면 14년이 되는 기간이다.
한청협의 해산은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우선 민족민주운동에 대한 시대적 평가가 있었다. 더 이상 재야 정치운동으로서의 민족민주운동은 의미가 없었다. 이미 전국연합에서는 독자정당을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97년 대선 직전에 만들어진 국민승리21 이 그것이다. 국민승리 21은 대선에서 지고 2000년 1월 민주노동당으로 재탄생 됐다. 합법정치영역으로 옮겨간 것이다.
두 번째로, 통일운동에 대한 방법이나 방향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통일운동은 합법적 영역으로 전환됐다. 북한에 대한 이해가 다양해 졌다. 굳이 재야에서 통일운동을 전개해야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일부 있었지만 재야에서의 운동이 김대중 정부의 현실정치에서 이루어지는 통일정책을 넘어설 수 가 없었다.
셋째로 청년운동이 정치적 선봉대 운동이라고 할 때 이미 우리 사회의 정치적 다양성이 존재하는 가운데 기존의 민족민주청년운동은 그 사명을 다하고 있었다. 정치에 대한 이해가 다양했기 때문이다. 정당에 대한 이해도 다양했기 때문이다. 한청협 이후에 민족민주청년운동을 계속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새롭게 한청을 만들었다. 이들이 지금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나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추측컨대 정치정당으로는 지금의 민노당, 통합진보당을 지지 하거나 당원으로 활동 할 것이고, 한편으로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지원활동, 반핵, 반전, 반미, 통일 등을 구호로 해서 활동 하거나 아니면 현실정치에 출마해서 기초, 광역, 국회의원, 자치단체장 등의 활동을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청협을 발전적으로 해산 한 사람들은 민주당이 개혁당으로 가서 지금 역시 국회의원, 지방의원, 자치단체의 장을 맡고 있거나 지역에서 다양한 시민운동이나 통일, 노동자, 농민, 반핵, 반전, 환경 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두 그룹의 차이가 있다면 지지하거나 참여하는 정당이 다르거나 운동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이다.
한청협이 새로운 청년운동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한국청년연맹 준비위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했다. 하나는 새로운 청년운동 조직의 건설이고 또 하나는 다양한 청년들과 함께 새로운 정치조직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KYC이고 또 하나는 99년 가을쯤 한강 유람선에서 창립한 ‘제 3의 힘’이다.
이 조직에는 이정우, 천호선, 고진화(전 국회의원), 이규희, 이인영(현 국회의원), 우상호(현 국회의원), 오영식(현 국회의원), 임종석(전 국회의원), 정태근(전 국회의원), 유기홍(현 국회의원) 등 당시에 내로라하는 정치지망생들이 참여했다. 나도 청년운동을 대표해서 발기인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 조직은 얼마지 않아서 주요지도부가 2000년 총선에 참여하면서 사실상 해체의 수순을 밟았다. 각자의 정치적 진출을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 했다. 일부는 한나라당으로, 일부는 새천년민주당으로....그렇게 각자 갈 길을 갔다. 원래는 이렇게 힘을 모아서 2~3년 후에 새로운 정당을 만들기로 했었다. 하지만 눈앞에 다가온 총선을 앞두고 각자에게 유리한 정당에 참여했다. 앞으로 싹수가 노랗다고 보면 딱 맞겠다. 사실 나는 이 조직이 새로운 정당건설로 나가는 줄 알았다. 사기당한 기분이었다. 그 후 나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충주 집으로 낙향했다.
내가 한청협의 문을 닫고 KYC 준비위원회를 만들 때였다. 어느 날 우상호 형네 집에서 잤다. 다음날 인영이와 목동에 있는 종원이네 가계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날 술을 엄청 먹었다. 인영이가 KYC를 맡기로 했다. 나는 한청협을 시집보내는 심정이었다. 한청협을 기반으로 해서 새로운 청년조직을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없으면 한청협의 지역조직은 서운해 할 것이었기 때문 이였다. 나는 인영이한테 잘 부탁한다고 했다. 그렇게 내가 가꾸어온 청년조직을 넘기고 나는 떠나야 했다.
그렇게 해서 KYC가 창립되고 나는 모든 운동권 조직에서 떠나게 됐다. 당시에는 내가 그렇게 떠나는 줄 몰랐다. 어딘가 언저리에 있겠지 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어느새 내가 해왔던 운동의 영역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상현이가 병원에 있으면서 나는 병원생활을 계속했다. 나는 그 후 99년 5월쯤 이규의 선배를 만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초기에 정책실장으로 일했다. 하지만 오래는 할 수가 없었다.
집안에서는 상현이가 연속해서 수술을 해야 했다. 집사람은 너무도 힘들어 했다. 우리 가족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나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나의 인생살이 59
사랑으로도 안 되는 것이 있다. 후회 없는 청춘을 살았다.
상현이가 아프면서 우리 집은 정말 힘들었다. 나는 한청협 사무처장을 하면서 집에도 잘 들어가지 못했다. 월급도 없는 일을 하면서 오히려 돈을 모아서 사무처를 운영해야 했다. 낮에는 사무실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병원에서 잠을 잤다. 서울에는 자취할 방도 없었다. 주말이면 서울에서 충주 집으로 티코 타고 다녔다.
집사람은 엄청 힘들어 했다. 어느 날부터 극단적인 언어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무섭기도 했다. 연속되는 상현이 수술로 빚이 늘어나기만 했다. 상현이가 병원에 있을 때는 집사람은 은서를 데리고 혼자서 집에서 밥해먹으며 출근했다. 나는 서울에서 한청협 일하고 저녁에는 병원에서 상현이 간호하고...
사면초가였다. 한청협 ...실무책임을 맡았으니 그 책임은 다해야 했고, 집안은 집사람부터 아이들까지 말이 아니었다. 조금만 더 버티자! 버티자!
98년 내가 사무처장으로 일하던 늦봄 어느 날 이었다. 안희정(현 충남지사)이가 사무실에 왔다. 희정이는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일을 했는데 장수천 쪽 일을 했던 모양이다. 나보고 장수천 충북본부장을 맡아서 일 해보라고 했다. 돈도 벌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현재 하고 있는 일도 힘들다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만약 내가 그 일을 받아들였다면 훗날 나는 노무현 대통령과 깊은 관계있는 사람이 됐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대통령이 될 사람들과 사전에 인연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과도 그랬고 노무현 대통령과도 그랬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의 인연을 굳게 맺지 않았다. 내가 하고 있는 현실에 충실했다.
청년운동을 마치고 99년 5월 이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준비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와중에 집사람이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겠다고 했다. 나는 답답했다. 어디 취직할 곳도 없고, 그렇다고 특별히 기술도 없고, 자본도 없고....나는 규의 형과 함께 하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준비 일을 그만 두었다. 7월쯤 해서 충주 집으로 내려갔다.
97년 11월 초 상현이 수술 때문에 서울에 갔다가 한청협 사무처장이 된 이후로 내가 맡은 일을 다 하고 99년 여름 1년 6개월 여 만에 나는 충주 집으로 돌아 온 것이다. 이제야 정말로 자연인이 됐다. 아무것도 없는 자연인인 것이다. 이제는 당분간 상현이 보면서 집사람과 은서를 데리고 잘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집사람과 관계가 급속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서로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까지 온 것이다. 어느 날 집사람은 공무원을 퇴직했다. 다른 길을 가야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공부를 했다. 꿈이었던 교사가 되고자 함 이었다.
집사람이 퇴직을 했으니 직장의료보험이 안되고 그래서 지역의보에 내 이름으로 가입하라고 했다. 세상의 현실에 직면한 것이다. 나는 할 수 없이 아이들을 청주 어머니 집에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충주에서 청주로 이사를 했다. 99년 10월쯤 이삿짐을 싸서 모충동 어느 조그만 단칸방에 살림을 옮겨 놓고 풀지도 않았다. 내가 다시 집사람과 함께 2001년 2월 철원으로 이사하기 까지 그 짐은 그대로 있었다.
99년 가을, 청주로 이사 가려고 짐을 싸는데 누가 들어왔다. 종원이 였다. 신문 한 장 들고 그렇게 집에 나타났다. 직감적으로 뭔가 있었구나. 나는 종원이를 데리고 소백산 정상에 갔다. 홀랑 벗고 세상을 향해 소리쳤다.
야 ~~~뭐가 이러냐?
우리가 뭘 잘못 한 거야?
내가 운동을 정리하면서 맞은 마지막의 모습이다.
내가 운동을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왜 나는 민주화, 통일, 민중, 자유 등등을 외쳤던가?
삶에 대해 회의가 왔다.
청주 어머니 집에 아이들을 맡겨놓고 나는 한 없이 울었다.
85년 3수 끝에 대학에 들어가 학생운동을 시작한 이래로 88년 대학졸업도 하기 전에 나는 재야운동에 뛰어 들었다. 청주민청을 통해, 한청협을 통해 나는 새롭게 태어났다. 충북민협에서 충북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까지 10년 동안 충북 청주의 지역운동을 이끌었다. 98년부터 99년까지는 전국청년운동의 역사를 바꾸는 역할을 했다. 마지막에는 가정이 흔들리는 아픔을 격어야 했다.
후회 없는 청춘을 살았다.
시대는 해방 후 처음으로 정권이 교체돼 김대중 국민의 정부가 순항하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고 남북화해를 위해 98년 9월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가 만들어 졌다. 한청협을 해산하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그것이 위안이 됐다. 한청협을 같이 했던 기홍이 형이 사무처장, 승환이 형이 정책실장, 만희형이 조직국장을 맡았다. 나는 정책위원을 맡았다. 98년 만들어진 서울시 제2건국위원회 상임위원을 맡기도 했다.
한청협을 함께 했던 우리는 99년 5월 한청협전국동지회를 만들었다. 함께 일했던 청년운동시절의 동지들과 만나서 소주도 한잔하고 우리가 할 일이 있으면 해보자는 취지였다. 그리고 우리는 89년 전청대협 부터 98년 한청협 마지막까지의 ‘한청협 10년사’를 책으로 만들었다. 내가 한청협의 마지막 실무책임자 여서 여러 가지 일이 나한테 집중됐다. 역시 처음과 끝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끝에 일을 맡으면 앞으로 피곤해 진다. 나는 영원한 한청협 실무책임자다. 현재는 만희형이 회장을 맡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인생 3막이 막을 내리게 됐다.
재야 운동은 재미있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고 학생운동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운동이었다. 나는 재야 운동을 통해 정치를 배웠다. 재야 운동을 통해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재야 운동을 통해 이 땅의 민중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배웠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지만 오로지 사명감과 역사발전을 믿었기에 힘들어도 참을 수 있었다.
내가 이 운동에서 떠나올 때 나는 빈 털털이였다. 기력이 쇄진해서 거기에서 나왔다. 모든 걸 다 놓고 거기에서 나왔다. 긴 터널을 지나온 느낌이다.
이제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인생 4막이 시작된다.
또 다시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다.
태어 날 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 고향 비화진을 떠나올 때 우리는 아무것도 없이 떠났다. 태백에서 새로 시작해 청주로 떠나올 때도 아무것도 없이 빈 털털이로 왔다. 그리고 청주에서 철원으로 갈 때도 아무것도 없이 갔다. 부모님이 춘천으로 오실 때도, 학생운동을 마칠 때도, 청년운동을 마칠 때도 나는 모든 것을 두고 빈 털털이로 떠나왔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인생 4막에서는 현실정치에 참여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써나갈 것이다.
이제 다시 긴 여행을 떠나 보자!
60편 이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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