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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인터넷뉴스 | 입력 2013-04-03 오후 01:37:45 | 수정 2013-04-03 오후 01:37:45 | 관련기사 6건
지난 3월 27일 출판됐던 페이스북커 박영호의 "나의 인생살이" 제2편이 이어집니다.
[나의 인생살이 15
대학이 이런거구나~~~
85년 가까스로 대학에 입학했다. 집안에서는 고등학교 입학 때 보다는 열기가 덜 했다. 다만 혼자서 고생해서 대학을 갔으니 대견하다고 했다. 광산 다니시는 아버님과 나를 위해 고생하신 어머님, 나 때문에 대학을 포기한 누나와 동생 모두에게 미안했다. 일단 합격이라는 것은 우리 가족에게 커다란 선물이 됐다. 당시 동료 광부의 자식 중에 대학에 가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버지는 내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동료들에게 한턱 쏘았을 것이다.
머리에 털 나고 처음으로 오게 된 청주는 그리 낯설지 않았다. 춘천이 교육도시였고 청주도 교육도시라 성향이 비슷했다. 친구들과 함께 대학 다니고자 했으나 모두 떨어지고 나만 붙어서 쓸쓸한 대학 생활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청주에 처음 와서 우선은 학교 정문에 조그만 자취방을 구했다. 밥해먹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법학과에 입학은 했지만 신문기자가 돼야겠다는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문과공부를 하면서 정치경제에 많은 관심 가졌고, 아마도 성적도 꽤 잘 나온 거 같다. 나는 지리에도 밝았다. 지금도 운전을 하면 어디든 찾아갈 수 있다. 서울에서 운전하고 다닐 때 친구들은 나보고 택시기사 해도 밥 벌어 먹겠다고 했다. 방향감각이 뛰어났다고나 할까? 그런데 골프를 치면 가는 공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노안 때문이겠지?.....
삼수를 했으니 누가 꼬드긴다고 넘어갈 사람도 아니고.....나는 사실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데모에 관심이 많았다. 이유는 앞에서 쭉 나의 삶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냄새를 풍긴 것 같다. 수첩에는 헌법에서 보장하는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뭐 등등. 대학가면 틀림없이 집회가 열릴 것이고 기회가 되면‘대학은 이래야 한다’라고 떠들고 싶었다. 그래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서 항상 가지고 다녔다. 준비된 데모 예비군이라고나 할까...
충북대학은 조용했다. 이화여대에서 가위가 내려왔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했다. 과 애들하고 친하게 지냈다. 개강 초 막걸리도 마시고....일부 삼수 동기들이 있어서 더 친하게 지냈다. 당구도 200을 쳤으니까 나이 어린 축들과 동기들이 형, 형 하면서 잘 따랐다. 일부 예의 없는 놈들은 나이를 무시하고 동기니까 맞먹으려 했다. 나는 이런 놈들 하고는 놀지 않았다.
한 일주일이 지났을까? 드디어 집회가 열린다는 공고문이 대학 여기저기에 나붙었다. 가슴이 떨렸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줄반장 한번 못해봤다. 나서기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전형적인 시골 촌놈이었다. 발표도 잘 못하고......그러나 나의 주장을 펼쳐 보여야겠다는 생각은 늘 있었다.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물가에 심어진 나무 같이 흔들리지 않게~~~~ 사실 이 노래는 교회 다닐 때 많이 불러서 거부감이 없었다.
점심 먹고 두시에 인문대 광장에서 집회가 시작 됐다. 나는 떨리는 가슴을 안고 집회장소로 갔다. 인문대 광장은 내가 다니는 사과대 뒷 편에 있어서 참가하기도 편했다.
아스팔트에 한 10여명이 앉아 있고 주변에 30여명이 둘러섰다. 그리고는 아무도 없었다. 사회자가 핸드마이크로 연설을 시작했다. 집회제목은 “총학생회 부활에 따른 학생회칙 의견수렴” 뭐 그런 것이었다. 어떤 학생이 나가서 자기의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대학은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돼야 한다며 일장 연설을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형은 독문과에 다니는 4학년이었다.
그리고 다음 의견이 있는 사람 나오라고 사회자가 재촉한다. 아무도 안 나간다.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 그렸다. 나갈까? 말까? 어디 나가서 연설 한번 해보지 않은 나에게는 너무도 가슴 떨리는 일이였다.
[나의 인생살이 16
난생처음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다!!!
그렇게 침묵이 흐르고..... 마음으로는 한 열 시간은 흘러간 거 같다. 드디어 마음을 정하고 손을 들었다. 주변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누군지도 모르고, 처음 보는 사람이 손을 들고 연설을 한다는 것은.... 나중에 함께 운동하던 선배들이 말하는데 내가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 했단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나온 사람들은 이미 학교에서도 소위 데모꾼으로 찍힌 사람들이었다. 서로 잘 알고 있는 이를테면 조직원들 이었다.
나는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거리가 10Km는 되는 거 같았다. 어떻게 걸어 나갔는지 지금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핸드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저는 법학과 85학번 신입생 박영호 입니다. 그리고 수첩을 꺼냈다. 총학생회가 부활돼... 학생회칙이 만들어 진다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있음을 학생회칙에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얼마를, 어떤 톤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던 거 같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고 마지막 주장을 하고 인사를 했다. 박수가 나왔다. 그리고 아마도 다른 학생들의 연설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약 한 시간 정도의 집회가 끝나고 모두 해산했다. 나는 오후 수업을 기다리기 위해 사회과학대학 옆의 등나무 벤치로 갔다.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집회가 끝나고 걸어가는데 누군가 따라오는 느낌이 있었다. 속으로는 경찰이 따라온다고 생각했다. 어떡하지? 이제 신입생인데.....이러다가 잡혀가는 건 아닐까? 엄마는 어떡하지? 어두운 탄광 안에서 오늘도 맏아들 잘되기를 기대하며 땀 흘리는 아버지는 어떡하지? 잡혀가면 맞을까? 엄청 때린다는데....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초조한 마음을 달래려고 담배를 물었다.
[나의 인생살이 17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연설 아닌 연설을 하고나니 다음날 법학과 학과장님이 불렀다. 자네가 그런 줄 알았으면 면접에서 떨어뜨리는 건데…….나는 갑자기 확 올라왔다. 뭘 잘못했다는 건가? 하지만 참았다. 그래도 교수님이시고....지도교수님도 불렀다. 과 선배들도 불렀다. 일부 선배들은 격려해 주었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저도 담배 한 대 얻어 필 수 있을까요? 당시 나는 청자를 피웠다. 200원 했다. 물론 서울에서 아르바이트 할 때는 500원짜리 솔을 피웠는데…….(담배 끊읍시다.) 가끔씩 손님들이 천 원짜리 팁을 줄때도 있고 돈이 부족하면 500원 주기 뭐하니까 솔 담배를 한 갑씩 팁으로 사주시기도 했다.
뒤 따라온 사람이 말을 걸었다. 나는 담배를 건넸다. 아까 연설 잘하시던...데요....침묵이 흐른다. 아~ 뭘요…….자기는 사과대 경제학과 4학년의 김재수라고 소개 했다. 그때서야 나는 한 시름 놓였다. 일단 경찰은 아니고…….아싸~~~~ 그다음 애기는 빤한 스토리였다. 나는 이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누군가 나에게 접근해서 소위 운동권 같이 해보자고 제안 할 것이라고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씩 웃었다. 뭘 공부하시고 싶으세요? 아 저요? 사회과학이요. 당연 기자가 되려고 하는 나에게는 사회과학 서적 탐독은 기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대학 들어오기 전까지 책을 읽지 않았다. 트라우마~~~~~
그런데 내가 책을 다시 읽어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3수 할 때 쯤 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내가 너무 무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친구들과 술을 한잔 하는데 도통 알아듣지를 못하는 말들을 했다. 사회과학이 아니더라도. 이를테면 어떤 소설책을 읽었는데 주인공이 어쩌고저쩌고....당구, 여자, 술집.....이런 애얘기 빼놓고 내가 한 얘기는 응 그렇구나! 그것이 전부였다. 대화가 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래 책을 읽자! 내가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면 책을 많이 읽어야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나중에 고등학교 친구인 윤기나 상은이, 재휘를 만났는데 이 친구들이 나보고 미쳤다고 했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고등학교 친구들과도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역사, 정의, 삶, 노동, 민주주의......어느덧 나는 내 스스로 머나먼 새로운 인생살이로 달려가고 있었다.
법학공부 교제 보다는 사회과학 서적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밥 먹을 돈으로 책을 샀다. 처음에는 얇은 책부터 샀다. 두꺼우면 혹 책을 접을 거 같아서 두려웠다. 재미를 붙였다. 밤이 짧았다. 수업시간에도 책을 읽었다. 아마도 일주일에 두 세권씩 읽었던 거 같다.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막걸리 한잔 먹으면서 연설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동기들이 들어주는 것이 좋았다. 그때쯤부터 나는 당구를 끊었다.
4월쯤인가? 윤기가 군대 간다고 청주로 왔다. 재휘랑 상은이도 왔다. 우리는 술을 실컷 먹었다. 친구들은 군대 가는 윤기보다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다음날 논산에다 윤기를 데려다 놓고 우리는 돌아섰다. 살아서 만나자!!!
어느 날 다시 재수 형을 우연히 걸어가다 만났다. 공부를 같이 해보자고 했다.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았다. 하겠다고 했다. 어느 날 어디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가보니 여학생 두 명과 남학생 두 명이 있었다. 서로 소개를 했다. 여학생 중 한명은 지리교육과 3학년이었고, 한 명은 사회학과 1학년, 그리고 또 다른 남학생은 물리교육과 1학년, 그리고 또 한 명은 공대 쪽인 걸로 기억한다. 왜냐면 이 친구는 어느 때쯤인가 부터는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포기한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다섯 명이 돼 수시로 만나서 책 읽고 토론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정의감에 불타는 개인이 아니라 충북대학교 학생운동의 조직원이 됐다. 어떤 조직인지, 이름도 없는 조직 같았다. 아마도 이런 것을 당시에 경찰이나 안기부에서 잡았다면 그림 그려서 엄청난 좌경 학생운동 단체를 적발 했다고 했을 것이다.
나는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이 너무도 좋았다. 사회경험도 있고 해서 내가 책을 받아들이는 속도는 동료들이 따라오기 어려울 정도였다. 3학년 선배도 가끔 나보고 쓸데없는 책을 읽는다고 할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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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호가 살고 있는 춘천시 |
[나의 인생살이 18
실천 없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85년도는 전두환 정권이 유화조치를 취할 때 쯤 이었다. 서울에서는 84년에 이미 총학생회를 구성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학에서 경찰이 철수하고 그야 말로 대학에 봄이 찾아 온 그런 시기였다.
그런데 충북대는 조용하니 이화여대에서 가위를 내려 보냈다는 소문이 날 만도 했다. 충북대학은 청주에 소재하는 국립대학으로 당시 학생수가 1만 명 정도였다. 학생들의 구성은 지방 국립대학이 다 그러하듯 해당 지역 고교 출신들이 대거 입학하고 일부 서울이나 여타의 지방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공부는 좀하고 돈은 없고…….나중에 청주대학과 충북대학의 학생들의 풍의 차이가 있음을 나는 눈치 챌 수 있었다. 청주대학교는... 사립대학이라 예술대학도 있고 해서 서울의 학생들이 많이 입학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도 연예계에는 청주대 영연과 출신들이 있다. 내가 알기로는 개콘에 나오는 개그맨 중에 청주대 출신들이 몇 있다.
어느 날 예쁘장한 후배가 아침에 우리 학교로 등교하는 것이다. 나는 당연히 이 후배가 청대생이라고 생각하고‘오늘 연합집회도 없는데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후배가 하는 말이 "선배님 저 충북대 다녀요".....지금은 충북대학교가 국립대학인 관계로 엄청나게 발전 했다. 나는 충북대학교를 사랑한다.
민주주의 투쟁 바람이 조금 늦기는 했지만 충북대학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총학생회가 부활되고 드디어 선거가 시작 됐다. 이때쯤 나는 법학과 1학년 대표 선거에 출마했다. 떨어졌다. 충주고 나온 학생이 당선 됐다. 동문들이 제일 많았다. 나는 동문이 하나도 없고 오로지 혼자였다. 술 좋아하고 놀기 좋아해서 몇 표가 나왔는데 당선은 되지 못했다. 지금 기억에는 내가 스스로 출마 한 거 같다.
같이 독서토론 하던 동료들과는 토론과 함께 전두환 정권의 광주학살에 대한 진실 알리기 홍보전에도 나섰다. 걸리면 안 됐기에 숨어서 뿌렸다. 강의실에, 화장실에…….처음에는 학교 내에 뿌렸지만 점점 더 간이 커져 시내 주택가에 뿌리기도 했다. 학교 화장실에 낙서도 했다. 당시에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걸리면 경찰이나 학교 당국으로 부터 작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와서는 서로의 무용담을 말하고, 또 책 읽고 토론하고 막걸리 먹고…….
85년 충북대학교 총학생회장 선거전이 시작되면서 후보들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 선배가 우리가 밀고 있는 후보가 있으니 선거운동을 하자고 했다.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미냐고 했다. 그랬더니 다음날 약속을 잡아 주었다. 만나보니 사람이 괜찮아 보였다. 행정학과 3학년이고 제천고 출신이라고 했다. 흰 머리카락에 키도 커 보이고…….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랐다. 다만 태백에서 청주 올 때, 내가 태백 철암에서 춘천으로 갈 때면 어김없이 제천을 지나야 했기에 제천에 대한 친근감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선거란 이런 것인 가보다. 일단은 유권자가 호감을 가질 수 있는 기본적 토대가 있어야 한다. 그 다음에 그 사람의 인물 됨됨이, 그리고 정책공약일 것이다. 이 점은 만고의 불변인거 같다. 내가 충북대학에서 총학생회장이 될 때는 이런 거 없이도 됐다. 강원도 출신에 150명밖에 안 되는 법학과, 고등학교 동문 전무!!! 이런 내가 충북대학교 총학생회장이 된 것은 그 이유가 따로 있었다.
역사의 흐름을 만들고 거기에 충실하면 된다. 나중에 청주에서 2004년 총선에 나가려고 할 때 역시 역사의 흐름을 만들고 충실했다. 하지만 거기에 인위성이 가미 됐다. 정당의 공천에는 장난이 가능하다. 없는 것도 만들어서 험담한다. 조그만 약점을 부풀려 사람을 바보 만든다. 나를 반대 하는 사람들 중에 강원도 출신이 청주에서 뭘 한다는 비판을 했다. 나는 이것을 넘기 어렵구나 하는 직감을 했다. 일단은 우리 모임에서 논의해서 밀어주기로 했다.
“가자! 찢겨진 자유의 깃 폭을 온 몸에 두르고!!!” 슬로건이 거창했다.
다른 진영의 학생들은 이 슬로건을 “가자! 찢겨진 똥 종이를 온몸에 두르고 화장실로!!!” 라고 패러디 했다.
우리는 선거운동을 열심히 했다. 아마도 후보가 6팀 이었던 거 같다. 사실 내가 선거를 직접 접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인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우리 집에서 교회 신도들이 모여서 민정당의 후보를 밀어주기로 하면서 돈도 나누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어머니는 후보가 삼척 김씨라고 아침 6시에 투표하고 오셨다. 어린 마음이지만 나는 이것이 옳지 않다고 봤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살지 않고 뭐 저딴 거를 하냐? 나는 6학년 때 태백권의 교회 성경퀴즈 대회에 동점침례교회를 대표해서 출전해 3등을 할 정도로 얄팍하지만 성경적 지식도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선거는 좋은데 선거운동이 올바르지 않다 생각했다. 그러고는 당분간 그런 것을 접할 기회도 없었다. 선거운동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좋은 사람이다. 나하고 같은 동료들이 밀기로 했다. 뭐 이런 정도로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다행히 우리가 지지하는 후보는 다른 다섯 후보와의 차별화가 있었다. 바로 민주주의 운동을 하는 그런 팀이었다. 나는 이점을 주변에 적극 홍보 했다. 적어도 진리의 상아탑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많이 수긍해 주었다.
물론 화장실에 휴지도 놓겠다. 비누도 놓겠다. 학생회비를 학생들을 위해 쓰겠다. 퇴폐적인 축제를 없애고 대동제로 바꾸겠다. 등등의 공약이 있었던 것도 기억한다. 하지만 대학생 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자존심을 건드는 것이 유일한 전략이었다. 이것이 먹히기 시작했다. 충북대학교는 죽은 학교다. 학생들이 너무 무식하다. 적어도 우리 학교가 살아나려면 이 시대에 데모도 해야 한다. 깨어나야 한다. 이번에 나온 우리 후보가 앞장서서 데모도 할 것이고, 그러면 이화여대에서 가위도 안내려 올 것이고....뭐 그렇게 자존심을 건드려 가며 선거운동을 했다.
학생들이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표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의 인생살이 19
지저분한 선거운동은 어디에나 있었다.
당시 충북대학의 총학생회장 선거는 기성 정치인의 선거와 다르지 않았다. 학교 주변 다방에 캠프를 차리고 동료나 후배를 데리고 가서 커피한잔 하고 찍어달라고 하는 그런 선거였다. 돈도 상당히 들었다. 들리기에는 상대 후보들은 1억씩 썼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어떤 후보는 다방을 열개를 잡아서 학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고도 했다.
우선 총학생회장이 되면 약 1억 원이 되는 학생회비에 대해 예산 편성을 할 수 있었고, 총학생회장이나 간부들에게는 전액 장학금이 나왔고, 동남아 해외연수도 있고, 축제니 하면서 스폰서도 받을 수 있었고, 졸업 앨범비 책정하면서 뒷거래도 있었고(요즘 가끔 언론에 이런 일을 하는 총학생회장이 잡혔다고 나온다. 참 썩었다.... 대학이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다시 대학이 살아났으면 한다. 취직의 노예가 아닌 진리의 상아탑으로!!! 최소한의 역사의식은 있는 그런 사람들이 숨 쉬는 그런 대학이 됐으면 한다. “청년이 살아야 조국이 산다!!!”.),
나중에 학교에서 취직도 시켜주고, 명예도 얻고…….이권이 상당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동문들 간의 치열한 자존심 싸움도 있고, 뒤에는 동네 깡패나 지역에서 장사하는 선배들의 보살핌도 있었고.....기성정치와 똑 같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겠다.
우리 켐프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에는 학생회 선거규칙에 학교 내에서는 선거캠프를 만들 수 없도록 해놔서 어쩔 수 없이 학교 후문쯤에 다방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교내 식당 한구석에서 선거운동을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 팀이 이겼다. 정말 좋았다. 총학생회장 선출되고 임기는 2학기부터 시작 됐지만 총학생회가 새로 구성돼 당선된 팀이 바로 일을 했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나는 선거가 끝나면 바로 철수하는 버릇이 있다. 나중에 정당에 취직해서 각종선거에 지원 나갔다. 당선되면 즉시 그 지역을 떠났다. 옆에서 내가 뭘 했니 하는 그런 소리가 너무 싫었다. 책 읽고 토론하고, 학과공부도 빠뜨리지 않았다. 1학기를 마쳤을 때 나는 C급 장학생이 됐다.
가끔씩 다른 학교 데모하는데 원정도 갔다. 몰래 학교 내에 유인물 뿌리고 …….그렇게 대학 첫 학기는 흘러가고 있었다.
[나의 인생살이 20
다시 아르바이트 현장으로 떠나다.
윤기는 논산 훈련소를 마치고 대구의 어느 부대에 배치를 받았단다. 우리는 면회를 갔다. 그런데 이놈이 나오질 안았다. 알고 보니 전날 보초를 서다가 졸았던 모양이다.
"폭파" 딱지가 붙어서 그 벌로 한쪽에는 워커신고 한쪽은 맨발로 완정군장해서 운동장을 돌고 있었단다. 우리가 면회 가지 않았다면 아마도 열 바퀴는 더 돌았을 것이다. 윤기는 가끔 나에게 고맙다고 한다. 역시 친구가 최고란다. 얼마 후 10월쯤에 재휘도 군대 갔다. 수방사에 배치됐는데, 87년 6월 항쟁이 일어났을 때 역시 완전군장하고 데모진압 출동명령을 기다렸단다. 만약 87년 전두환이 계엄을 선포했더라면 나와 재휘는 목숨 건 한판 싸움을 했을 것이다. 다행이도 전두환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국민이 무서웠나 보다.
여름 방학이 시작됐다. 나는 2학기 등록금 마련을 위해 서울로 아르바이트를 떠나야 했다. 모임에서는 농활을 가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갈 수가 없었다. 서울 명동입구에 YWCA 지하에 있는 코스모폴리탄이라는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던 일이라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가끔씩 선배한테서 전화가 왔다. 잘 지내냐고…….? 그렇게 한 달을 일하고 나는 집으로 갔다. 오랜만에 집에서 가서 놀고도 싶었다. 휴학을 하고 군대 갈까 생각도 했다
언론에서는 전두환 정권이 학원안정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난리를 치고 있다는 보도가 수시로 나왔다. 만날 운동권 조직이 어쩌고저쩌고……성 생활이 문란하고, 공부도 안하고....내가 지금 하고 있는데 이놈들이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건가? 나는 화가 났다. 그래서 학교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집에다 말씀드리고 다시 학교로 갔다. 가니까 난리가 났다.
총학생회에서는 학원안정법 반대에 대한 입장을 담은 홍보물을 만들어 전교생들에게 우편발송하려 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그 홍보물이 불온유인물이라며 제작과 발송을 못하게 했다. 나는 소식을 듣고 총학생회 사무실로 갔다. 잠시 후 학교 교직원들이 총 출동했다. 상황이 점점 꼬여갔다. 최근에 나온 영화 ‘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을 보는 듯 했다. 학생회관 입구에 바리케이트가 쳐 졌다. 나도 모르게 바리케이트 맨 앞에 섰다. 밤샘 대치상황이 벌어졌다. 새벽쯤에 교직원들이 바리케이트를 철거하면서 진입했다. 우리는 힘에 밀렸다.
2학기가 시작 됐다. 첫 번째로 대학 총장 이름으로 경고장을 받았다. 서면징계인 셈이다. 불온유인물 제작에 관여 했다는 것이었다. 우스웠다.
축제가 없어지고 대동제가 시작 됐다. 하지만 혼돈의 상태였다. 일부에서는 쌍쌍파티하고 일부에서는 줄다리기 하고…….뭐 다양성의 공존이라고나 할까…….
운동권 총학생회가 출범했지만 큰 데모 한번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데모를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85년 10월 학생의 날이 됐다. 집회가 열렸다. 총학생회장이 한복을 입고 나와서 제법 심각하게 연설을 한다.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겠다고 했다. 스크럼을 짜고 교문으로 향했다. 별 충돌 없이 돌아왔다. 그 후로 총학생회장은 체포됐다. 그렇게 맥없이 무너지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2학기가 시작될 무렵 동점에 있던 막내 동생이 왔다. 이놈은 다짜고짜 청주로 전학 오겠다는 거였다. 안 그러면 자퇴하겠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내 자취방에 같이 기거하기로 하고 전학을 시켰다. 졸지에 식모살이가 됐다. 막내는 중3이었다. 그래서 도시락도 싸주어야 했다. 김치도 담그고 반찬도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놈이 고등학교를 가야 하는데 태백중학교에서는 기술을 배웠는데 청주 세광중학교에서는 상업을 배운단다. 어찌됐든 학교에서는 일반계 고등학교에 원서를 쓸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 내가 책임질 테니 원서를 써 달라고 했다. 이놈은 고등학교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세광고등학교로 배정 받았다.
우리 모임은 계속해서 공부하고 토론하고 유인물 제작해서 뿌리고……이때쯤 해서 우리 모임에 새로운 사람이 결합했다. 이 사람과의 만남은 나중에 내가 총학생회장이 된 사연이 된다.
어느 듯 겨울방학이 됐다.
나는 또다시 고민했다. 이제 군대에 가야하나? 2학년에 진학을 못할 것 같았다. 모임에서 학습해야 했기에 아르바이트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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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호가 즐겨찾는 낙시터 |
[나의 인생살이 21
난생 처음 유치장에 가다.
2학년이 됐다. 신입생들이 들어왔다. 나는 신입생 헌팅에 나섰다. 왜냐고? 학습을 함께 할 후배들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할 동지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무엇보다 막걸리가 중요했다. 나는 술을 엄청 잘 먹었다. 책임감에 술도 취하지 않았다. 나는 충북대 후문에 있는 ‘대복순대’ 집을 잊지 못한다. 지금은 어머니 아버님이 많이 늙었을 것이다. 한 10년 전인가에 들렀더니 나를 알아 보셨다. 반가이 맞아 주셨다.
후배들과 공부를 시작했다. 후배들이 엄청 잘 따랐다. 나는 4명씩 한 조를 이루는 비밀모임을 4개나 운영했다. 한편으로 한국사상연구회라는 동아리에 가입해 거기서도 학습을 주도 했다. 서서히 충북대학에도 민주화 운동을 하는 조직원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비밀스럽게 늘어났기 때문에 당시에 얼마의 조직원이 있었는지는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점조직 형태였다.
나랑 함께 독서토론을 했던 후배들 중에는 감옥에 간 후배도 많이 있었고,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후배도 있었다. 지금도 지역에서 환경운동이나 시민운동, 재야 정치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하여튼 사람사업 하는 데는 재주가 있었다. 나는 나중에 내가 역사에 책임지는 것은 나랑 함께 한 사람을 책임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훗날 만약 오늘의 이 길이 틀린다면 나는 그들이 모두 떠나간 후에 마지막 멍석말아 들고 가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나와의 약속을 지켰는지는 솔직히 모르겠으나 적어도 상당부분은 지켰다고 생각한다.
학교 도서관에 대자보를 붙이기 시작했다.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니 학교 당국에서는 이것을 Ep는데 혈안이 됐다. 한번은 대자보를 붙였는데 경비아저씨들이 뜯어내었다. 그래서 내가 몸싸움을 했다.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학생처장이 직원들을 이끌고 오셨다. 나는 돌을 들어 머리에 대고 이거 찢으면 이 돌로 내 머리를 찍을 것이라고 했다. 모두 물러갔다.
처음에는 도서관 벽에 테이프로 붙었다. 그러면 찢어버린다. 다음에는 풀을 써서 붙인다. 그러면 아침에 경비아저씨들이 도서관 벽에 물을 뿌린다. 그래서 이번에는 본드를 섞어서 붙인다. 또 물을 뿌린다. 안되겠다. 새벽에 몰래가서 빨간 페인트로 도서관 벽에 아예 글을 쓴다. “전두환 군사독재 타도하자! 민주정부 수립하자” 학교에서 두발 두 손 다 들었다. 나중에는 대자보 게시판을 만들어 주었다. 경비 아저씨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이 시간 아저씨들의 건강을 기원한다.
86년 4월 19일! 집회가 있었다. 그날 정문까지 나가 처음으로 돌을 던지며 전두환 타도를 외쳤다. 커다란 충돌은 아니었다. 나는 아무 일 없는 듯 자취방에서 동생 밥해서 등교시키고 나도 수업 받으러 등교하려 했다. 갑자기 마루에 뭔가 툭하며 열쇠꾸러미가 떨어졌다. 대문으로 사복경찰 두 명이 들어왔다. 나는 도망갈 생각도 못했다. 같이 가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난생 처음으로 경찰서에 갔다. 우선 몇 대 맞았다. 그리고는 조서를 꾸미기 시작했다. 돌 세 개를 던졌다는 조서가 꾸며졌다. 법원에 즉결로 넘겼다. 오후에 재판해서 구류 3일이 떨어졌다. 간단히 살고 나왔다. 갑갑할 줄 알았는데 버틸 만 했다. 체질인가?
선배들은 나보고 뒷줄에서 스크럼을 짜라고 했다. 하지만 도서관을 돌고 정문으로 나가면 어느덧 맨 앞줄에 있었다. 그래서 사진에 찍힌 모양이다. 용감하기도 했다. 무서움이 없었다. 86년은 당시 신민당이 개헌 현판식을 할 때라 정국이 반전두환 시위로 넘쳐날 때다. 우리 학교에서도 투쟁위원회가 만들어져 데모가 시작 됐다. 5월 18일 다시 데모가 있었다. 나는 역시 맨 앞에서 전경을 향해 돌을 던졌다. 전두환을 지키지 말라는 의미도 있고, 전두환을 대신해서 ‘니가 맞아라’는 뜻도 있었다. 의무적으로 군대 와서 재수 없게 전경에 차출된 그들이 무슨 죄가 있겠냐마는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의 방법은 그것 밖에는 없었다.
이틀인가 지나 다시 경찰이 왔다. 또 잡혀갔다. 이번에도 실컷 얻어맞았다. 짱돌 두개를 던졌다고 조서가 꾸며졌다. 다시 법원으로 넘어갔다. 이번에는 구류 이틀이다. 저녁에 들어갔는데 다음날 아침에 내보내 주었다. 법원에서의 하루는 하루가 시작되는 0시를 의미하기 때문에 실은 0시에 내보내 줘야 한다. 지금도 감옥 가서 형기를 만기 채우면 0시에 내보내 주는데 이 때문이다. 그런데 구류를 살 때는 일찍 내보내 줘봐야 갈 때도 없고, 그리고 그런 제도가 있는지도 몰랐다. 아침에 나오는데 정보과장이 부른다. 다음에 한번만 더 하면 구속 시키겠다고...
다시 총학생회장 선거가 시작 됐다. 당시 우리학교의 총학생회장 임기가 3학년 2학기에 시작돼 4학년 1학기까지 했으니까 선거는 5월 달에 있었다. 작년 총학생회장이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잡혀가는 바람에 학생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번에 출마한 우리 후보는 너무 강성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결국 졌다. 민주화 운동을 내세운 우리 후보가 진 것이다. 대중은 언제나 냉정했다.
바로 밑에 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지 못했다. 방위를 받았다. 황지에 있는 볼링장에서 알바를 한다고 했다. 아마도 이놈도 나 때문에 대학에 가지 못했을 것이다. 동생은 신학교를 가서 목사님이 되고 싶어 있다. 너무도 미안하다. 고등학생이 된 막내는 내가 점점 운동에 깊게 빠지면서 어느 듯 집에 오는 날이 줄어들었다. 경찰들이 괴롭히니까....학교 교실에서 잠을 잤다고도 했다.
이 친구는 그 뒤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어여쁜 여인을 만나 20살쯤에 결혼하여 아들 하나 낳고 맨손으로 미국으로 유학가 비행조종 자격을 6개를 따서 귀국해서 아시아나 항공에 합격을 했으나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다. 나 때문이다. 95년 범민족대회 관련 국가보안법으로 살고 나온 것이 연좌제가 된 모양이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비행조종사는 가족사항을 심하게 보는 모양이다. 지금은 미국에서 IT관련 일을 하면서 곧 실리콘 벨리로 입성할 것이라고 얼마 전에 기별을 전해 왔다.
[나의 인생살이 22
총학생회장에 출마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책 읽고 토론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이제는 원서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사회과학 서적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어를 공부해서 일본어 원서를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선배가 일본어를 가르쳐 준다고 했다. 한 달을 배웠는데 히라가나 가타카나 밖에 못 배웠다. 그 형이 지금은 아프다고 한다. 건강하기를 기원한다.
후배들 공부시키랴, 내 공부하랴, 데모하랴, 동생 밥 해주랴,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지역의 충북민주운동협의회가 주최하는 각종 집회에 나가고, 특히 청주도시산업선교회에서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들의 억울함을 듣고 함께 해결하기 위한 행사를 자주 했는데 거기에도 빠짐없이 다녔다....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아시안게임에 대한 반대 투쟁이 있었다. 9월쯤이었다. 그날은 엄청 심하게 충돌했다. 학교 내에서 사찰하던 사복경찰 두 명이 학생들한테 잡혀서 엄청 맞았다. 그리고 데모 주동자는 집회 마친 후에 바람같이 사라졌다. 나는 그를 호위해 안전한 곳까지 바래다주고 다시 학교로 왔다. 화염병도 출현 했다. 이날 싸움은 꽤 컸다.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진 우리는 투쟁위원회를 만들어서 열심히 싸웠다. 어차피 우리는 민주화를 이루어야 겠다고 생각했기에.....
선배들은 차기 총학생회를 잡기 위해서는 일찌감치 준비해야겠다는 판단을 한 모양이다. 선배들이 우리 모임에 있던 사람을 총학생회장 후보로 지명했다. 그 사람은 투쟁력도 있었고, 무엇보다 청주에서 고등학교 나왔다. 당시 충북대학교의 학생운동 세력이 적어서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이기려면 여러 가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조직에서는 그 사람을 투쟁에서 뒤로 빠지도록 했다. 괜히 잡혀가면 후보가 없어지는 꼴이 되니 말이다.
아뿔싸~~~아시안게임 반대 시위가 엄청 커져서 경찰이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사복경찰이 두들겨 맞았으니 보복을 해야 했을 것이다. 나는 그날 이후 잽싸게 숨었다. 잡히면 구속될 판 이었다. 나는 수배상태가 됐다. 그런데 조직에서 총학생회장 후보로 지명된 사람은 그날 자신은 데모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정문을 걸어 나갔다. 그런데 경찰이 잡아갔다. 그리고는 그 이전의 시위를 문제 삼아 냉큼 구속을 시켜 버렸다. 선배들은 난리가 났다.
나는 수배 중에도 학교에서 계속해서 투쟁을 했다. 그리고 후배들 공부도 시켰다.
어느 날 경찰이 학교에 연락을 한 모양이다. 자수하면 봐준다고 했다. 아마도 그날 시위로 구속자가 나왔으니 사건을 마무리 한 모양이다. 나는 일단 2학년 기말고사를 보고 가겠다고 했다. 구속시키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믿었다. 그리고 출두했다. 이번에는 때리지 않았다. 나도 어느 듯 청주 서부경찰서에는 단골이요, 꽤 비중 있는 인물이 됐던 모양이다. 조서 받고 정말로 나왔다. 훈방처리 됐다. 왠지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나는 운이 참 좋은 사람인거 같다.
이때쯤 돼서 경찰은 나를 요주의 인물로 보고 내가 없어지면 청주 세광고등학교에 다니는 막내 동생을 찾아갔단다. 수업시간에 동생을 불러 형 어디 있냐고 물었단다. 내가 2학년 이니까 동생은 고 1이 됐다. 수배당하고 유치장 다니고 하니까 어느 날부터 동생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학교 교실에서도 잠을 잔 모양이다. 겨울 방학이 될 쯤에 나도 자취방이 없어졌다. 사회과학서적은 모두 싸서 어디에다 갔다 놨는데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 지금도 그 책을 찾고 싶다. 경찰은 사회과학 서적을 불온서적이라 해 압수하거나 나중에 특정서적을 읽어서 사상이 물들었다고 구속사유에 포함시키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연락이 됐는데 동생은 같은 반 친구네 집에서 있었다. 나도 같이 거기서 자취를 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연탄불도 꺼지고 해서 아침 일찍 석유곤로를 켜놓고 그만 잠이 들었다. 얼마를 잤을까 누군가가 방문을 마구 두드린다. 깨어보니 풍로에 불이 붙어 곧 천장에 불길이 닿게 생겼다. 하마터면 큰불을 낼 뻔 했다. 아마 그것이 불길로 이어졌다면 우리는 죽었거나 아니면 감옥살이를 했을 것이다. 그랬으면 아마도 나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우리는 늘 하던 데로 열심히 공부하고 유인물 만들어 주택가에 뿌리고, 기습가두시위 하고.....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모임의 선배가 하는 말이 내가 대타로 차기 총학생회장 후보로 지명됐다고 통보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동안 초등학교 다니면서부터 줄반장 한번 안 해본 내가 대학의 총학생회장 후보가 되다니.....가슴이 떨렸다. 별생각이 다 들었다.
그때쯤 감옥에 갔던 원래 후보가 출소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같은 모임으로 열심히 토론하면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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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 상현이 중학교 졸업식장에서 |
[나의 인생살이 23
총학생회장에 당선되다!!!
연설을 잘하지 못해서 나는 트레이닝을 받았다. 새벽에 산으로 뛰며 운동하고, 5분 스피치도 했다. 강훈련이었다. 담배피고 술 먹고 했으니 건강이 좋을 리 없었다. 선거 전략도 짜야했다. 잡히지 않으면서도 투쟁에 선봉이 돼야 했다. 어차피 싸울 건데 안 잡히면서 싸움을 지도하면 얼마나 좋은가?
그렇게 해서 3학년이 되고 드디어 선거전에 임했다.
86년 서울에서는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의 건대투쟁이 있었다. 학생운동 조직이 와해될 위기였다. 서울의 주요대학의 총학생회장 선거가 87년 봄으로 미루어졌다. 나는 고대와 연대의 총학생회장 선거를 참관했다. 두 학교의 총학생회장 선거는 정말 분위기가 달랐다.
고대는 당시 이인영(현 국회의원)후보가 출마했는데 ...검은 두루마기에 머리띠 동여매고 민족고대를 외치며 군사독재와의 일전을 치르겠다고 호소했다. 당시 이인영과 붙었던 다른 후보는 고대 앞으로 전철이 지나가게 하겠다고 공약했다. 나는 웃었다. 자기가 국회의원도 아니고....세월이 지나 지금은 고대 앞으로 지하철이 다닌다. 그 학생은 선견지명이 있었나 보다. 아마도 고대 앞으로 지하철이 지나가는 것은 그 학생 덕분인지도 모른다. 이인영이 당선 됐다.
그리고 연대를 갔다. 연대는 두 팀이 출마 했는데 이거는 완전히 축제 같았다. 바이올린 연주하면서 유세했다. 우상호(현 국회의원)가 당선 됐다. 나중에 알았는데 연대에서 우상호 에게 떨어진 사람이 동해 출신이었단다. 우상호는 철원 출신이고....둘 다 강원도 출신이다. 대단하다.
두 학교의 총학생회장 선거를 보면서 많은걸 느꼈다. 한편으로 막걸리와 맥주의 문화풍토 차이도 느꼈다. 역시 나는 막걸리 파다!!!
아무래도 총학생회장 선거를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조직에서 모금을 했다. 용돈을 모았다. 아마도 4~50만원 걷힌 모양이다. 나도 책임을 져야 했다. 당시 누나가 선봐서 곧 결혼할 사람이 있었다. 매형 될 사람이었다. 나는 찾아갔다. 사실이 이러저러 한데 돈이 없으니 돈을 좀 달라고 했다. 10만원을 주셨다. 나는 그날로 이 사람을 나의 매형으로 받아 들였다. 매형! 감사합니다. 그렇게 해서 선거가 끝나고 우리 팀이 쓴 예산은 총 65만원 이었다.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다. 플랭카드, 홍보물인쇄, 벽보는 만들고, 나머지는 그야말로 발로 뛰는 선거!!!!
여기서 한 가지 말한다면 이렇게 돈이 안 들고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시대를 만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그 이전에 수많은 투자를 한 셈이다. 자신을 던져 학우대중들과 친밀도를 높였고, 학우들이 무엇을 원하는 가를 파악하고 함께 실천했기에 돈이 필요 없이도 당선 됐던 것이다. 이건 선거에서의 기본이다. 그렇지 않으면 용쓰다가 돈 쓰고 떨어지고 이혼 당한다.
물론 선거는 과학이다. 실무적인 것이나, 상황 돌아가는 거, 상대가 있기에 그때그때 판단......요즘은 선거운동이 다양해져서 너무 스킬위주로 흐른다. 이렇게 되면 돈쓰는 선거가 되고, 한편으로 대중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홍보전이 돼 누가 더 자기를 위해 일해 줄 것인가 하는 소위 정책선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기투표가 되는 것이다. 선거 컨설턴트 들이 들으면 아주 싫어할 애기다.
86년으로 기억된다. 당시 청주대학교 총학생회장 선거에는 총 18팀이 나왔는데, 한 팀은 추천인 300명을 채우지 못해서 등록취소 되고 결국 17개 팀이 출마 했다. 한 팀당 30분의 연설시간이 주어졌는데 계산해 보라! 아침 10시부터 연설이 시작돼 저녁 늦게까지 연설을 하였다. 연설에 나선 후보들의 면면을 보면 황소처럼 일하겠다고 황소를 끌고나오고, 어떤 팀은 광주항쟁을 재현한다고 군복입고 목총 들고 나오고, 또 어떤 팀은 도서관 옥상에서 인형을 떨어뜨려 정말로 투신자살하는 줄 착각하게 만들었다.
내가 이것을 기억하는 것은 당시 청주대학교 선거에 나온 운동권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유세에 박수부대로 갔었기 때문이다. 연설하는데 아무도 없는 후보도 있었다. 누가 당선됐는지 모르겠다. 이런 선거를 해서야 되겠는가! 물론 청주대의 운동진영 후보는 그렇지 않았다. 참으로 열심히 했다.
총학생회장 후보는 내가 됐는데 러닝메이트가 없었다. 나는 그동안의 관행적으로 치러진 선거지형에서 보면 엄청 불리한 조건에 있었다. 우선적으로 지연, 학연, 혈연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지역적으로는 강원도 출신이요, 학연으로는 강원사대부고 출신으로 당시 충북대학교에는 동문이 한 명 있었다. 혈연은 더군다나 없다. 나는 청주에 머리털 나고 처음 발을 디딘 사람이다. 그것도 대학 때문에.....그리고 단과대학도 사회과학대학 법학과로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았다. 공과대학은 3.000명의 학우들이 있었다.
믿을 것이라고는 오로지 투쟁력!!! 민주화 운동에 대한 확신! 그리고 시대가 민주화시대로 가고 있다는 거~~~~사실 가장 큰 것은 시대가 민주화 시대로 가고 있고 이것을 우리가 만들어 가고 있었고, 거기에 대한 확실한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만들어 먹어야 한다. 모든 선거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시대를 읽지 못하면 선거는 한낱 기술과 개인의 출세욕에 의한 돈 잔치에 불과함을 나는 익히 알고 있다. 역사는 그런 것이다.
나는 현대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역사를 만들은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 이 두 사람은 역사가 올바르게 가게 하기 위해 자신을 헌신해서 싸웠고, 시대의 흐름을 만들어 결국은 대통령이 된 분들이다. 나머지 대통령들은 역사의 흐름을 역행한 사람들이라고 본다.
그래서 우리는 농대 다니는 사람을 러닝메이트로 맞았다.
이광희 다. 이 사람은 농대에 다녔지만 역시 서울 출신이었다.
선거전이 시작됐다.
후보 등록이 시작됐다. 후보등록 조건으로 학점 조항이 있었다. 그 전까지는 전(全)학기 B학점 이상이었다. 그런데 바뀌었다. 전(前)학기 B학점 이상 이란다. 환장하세....그런데 오히려 이 조항이 내가 후보 등록하는데 도움이 될 줄이야......나는 1학년 2학기, 2학년 1학기에는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C학점을 겨우 맞았다. 그런데 2학년 2학기에는 공부를 해서 학점이 B가 됐다. 아시안게임 반대 싸움하고 수배당해서 공부만 했던 모양이다. 나는 등록할 수 있었다. 전(全)학기로 평점으로 하면 C학점이 나온다. 만약 구 규칙으로 했다면 아마도 나는 총학생회장 선거에 등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느님이 도우사 나는 등록을 할 수 있었다.
4팀이 출마했다. 나는 기호 2번 이었다.
“민족지성 충대여! 그대의 투혼으로 반도를 하나 되게!” 나의 슬로건 이었다.
우리는 선거운동의 혁신적 변화를 추구했다. 먼저 현 총학생회의 무능을 공격했다. 때는 87년 5월 이었다. 객관적 조건이 너무 좋았다. 전두환 정권과의 일대 혈전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현 총학생회가 민주화 투쟁을 하지 않은 것은 많은 학우들로 부터 비판받기에 충분했다. 또한 우리가 그동안 열심히 싸워서 많은 학우들로 부터 인정을 받았고, 나아가 학생운동 하는 조직원들도 상당히 늘어났다. 시대는 우리의 투쟁으로 민주화로 흘러가고 있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대중운동이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학생들은 인정해 주었다.
둘째로 선거운동을 과감하게 바꿨다. 기존의 다방선거를 버리고....당시 우리학교 학생회장선거 규칙에는 학내에서는 선거캠프를 설치할 수 없도록 돼 있었다. (이유는 면학분위기 헤친다는 구시대의 논리였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 주변 1층 상가를 빌렸다. 거기에다 돗자리를 깔고 선거운동을 했다. 학생들이 오히려 먹을 것을 사다 주었다. 음료수며, 김밥이며.....이후 내가 당선되고 나서 이 규칙을 바꾸어 학내에서 캠프를 구성할 수 있도록 했다.
아침 일찍 도서관 앞에 찾아가 도서관의 장서확충과....등등 인사를 했다. 인기가 좋았다. 저녁에는 여학생 기숙사 앞에 가서 인사 했다. 열기가 대단했다. 부회장 후보는 얼굴이 예쁘게 생겨서 벽보의 사진이 뜯겨 없어지기도 했다. 나는 보지 못했다. 사진이 없어진 사람의 주장이다. 아직도 확인은 안 된다. 당시에 선거벽보는 인쇄를 할 수 없어서 직접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사진을 붙였다. 연설 연습을 해서인지 연설도 잘했다. 사실 1차 합동연설은 못했다. 많이 긴장했다. 하지만 2차, 3차 때는 분위기를 압도했다. 선거분위기는 점점 더 좋아졌다.
그런데
“가자 북으로! 지상의 낙원으로! 기호 2번 박영호 이광희 선거운동본부”
투표 당일 새벽이었다. 누군가 달려와서 깨웠다. 이상한 유인물이 뿌려졌다며 들고 왔다.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의 후보가 공동 명의로 빨갱이 박영호는 절대 총학생회장이 될 수 없다는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고 있었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학우 여러분! 여러분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리겠습니다.....
투표가 마감되고 투표함은 총학생회 사무실로 모였다. 개표참관인들이 들어가고 문이 잠겼다.
우리는 대잔디밭에 앉아서 교내 방송이 흘러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쪽에서는 야구방망이 끄는 소리, 쇠몽둥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오더니 심각한 상황이 될 수 있으니 일단 피하라고 했다. 우리는 일단 학교를 나왔다. 그리고 배가고파 어느 중국집에서 밥을 먹는데 연락이 왔다.
우리가 과반에 가까운 득표로 당선 됐다고 했다.
그날 밤 충북대 후문에 있던 우리 선거캠프는 박살나고 학교 주변은 계엄령이 내려진 듯 했다.
24편 이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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