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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인터넷뉴스 | 입력 2013-05-28 오후 02:42:41 | 수정 2013-05-28 오후 02:42:41 | 관련기사 7건
페이스북커 박영호의 ‘나의 인생살이’ 4막 2장이 연재 됐습니다. 연재 횟수가 거듭될수록 박영호의 인생 뿐 아니라 그 내막이 흥미진진합니다. 누가 읽어도 재미있는 글이지만, 특히 이번 4막 2장은 정치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고성인터넷뉴스 메인 검색창에서 박영호를 치시면 지난 1,2,3막을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나의 인생살이 74
열린우리당이 창당 되다!
2003년 10월 27일 열린우리당 창당준비위원회가 구성되고 28일에는 충북 추진위원회가 구성 됐다. 나는 열심히 뛰었다. 다가오는 총선도 총선이지만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정치개혁과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당이 필요했기 때문에 많은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정말로 열심히 뛰었다.
열린우리당은 2003년 7월 7일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이부영, 이우재 등 5명과 9월 20일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한 강봉균, 김근태, 김덕배, 김명섭, 김성호, 김원기, 김태홍, 김택기, 김희선, 남궁석, 문석호, 박병석, 원혜영, 설송웅, 송석찬, 송영길, 송영진, 신계륜, 신기남, 유재건, 이강래, 이상수, 이원성, 이창복, 이해찬, 임종석, 임채정, 장영달, 정대철, 정동채, 정세균, 천용택, 홍재형, 9월 23일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김덕규, 11월 1일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최용규 등 35명, 11월 3일 개혁국민정당에서 탈당한 김원웅, 유시민 등 2명의 의원을 주축으로 해 당원들의 주체적 참여 속에 2003년 11월 11일 창당 됐다. 그러고 보니 11월 11일은 우리 상현이 생일이다. 97년 11월 11일 상현이가 태어났다. 나와는 대단한 인연이다. 그리고 2004년 1월 11일 임시 전당 대회를 통해 정동영 의원이 첫 당의장에 당선됐으며 김근태 의원이 첫 원내대표가 됐다.
당의 지지가 높다고 나의 지지도가 높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인지도와 지지도를 높이기 위한 행동을 여러 가지로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공약한 신행정수도 이전과 관련한 법안이 한나라당의 반대로 무산위기에 처했다. 나는 지방분권을 위해서는 충청권에 신행정수도가 건설돼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신행정수도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단식을 하기로 했다. 11월 26일 부터 나는 열린우리당 충북도당에서 10일간 단식을 했다. 나는 성명을 통해 “국회가 지난 11월 21일 신행정수도 특별법안의 효율적 심의를 위한 신행정수도 건설특위 구성안을 부결시킨 것은 지난 대선에서 행정수도 충청권 이전에 대해 이뤄낸 국민적 합의를 국회가 거부한 것으로 국민에 대한 직무유기”라고 주장했다. 나의 단식은 많은 사람들로 부터 호응을 얻었다. 충북의 다른 지역에서도 단식과 1인 시위가 이어졌다. 나는 12월 초쯤 해서 김원기 당 대표께 우리의 의지를 담은 성명서를 전달하면서 단식을 마쳤다.
나는 그동안 재야운동을 하면서 몇 차례 단식을 한 경험이 있다. 우선 87년 12월 내가 충북대학교 총학생회장을 할 때 공명선거를 위해 기말고사를 연기해 달라고 단식을 12일간 한 적이 있다. 관철 됐다. 그리고 90년 10월쯤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 했을 때 보안사 해체를 요구하면서 10여 일간 단식을 했다. 이후에 이것도 관철돼 지금은 국군기무사로 변화 됐다. 이번이 세 번째의 단식인 것이다. 단식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마지막에는 물도 먹지 않는다. 인간의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신행정수도 특별법은 2003년 12월 29일 재적의원 194명 가운데 167명 찬성, 13명 반대, 14명 기권이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국회를 통과해 2004년 4월 시행에 들어갔다.
이렇게 통과된 법안에 대해 박근혜씨는 자신이 노력해서 됐다고 우겼다. 일정하게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해 노무현 대통령의 공약이요, 열린우리당의 공과요, 충청권 시민들과 지역균형발전을 바라는 국민들의 여망이 하나로 합쳐서 된 것이다. 남의 공과를 가로채기 하면 안 된다. 양심이 있어야지.... 나중에 이 법안은 2004년 10월 21일 위헌판결을 받았다. 관습법상 안 된다는 논리였다. 웃긴다. 이때 박근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노무현 대통령은 후속조치로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한 연기ㆍ공주 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을 국회에 제출했고, 2005년 3월 국회를 통과했다. 지금의 세종특별시가 탄생한 과정이다.
나는 이 법이 통과되고 나서 청와대 정책관리국장을 하던 김성환(현 노원구청장)을 초청해 이 법안의 의미에 대해 강연회를 열었다. 김성환 청와대 정책관리국장은 특별법의 국회통과 의미에 대해 “굳이 충청권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근본적인 국가혁신적 측면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2004년 1월 2일부터 열린우리당 에서는 17대 총선 출마후보자 모집에 들어갔다. 나도 당연히 신청했다. 내가 원하던 청주 흥덕갑 지역에는 나를 비롯해 행렬이 형이 등록을 했다. 대학 1학년 때 나와 같은 그룹에서 운동하고 원래 총학생회장 후보 였는데 감옥 가는 바람에 내가 대신 총학생회장이 되고, 그리고 내가 총학생회장 할 때 기획부장하고, 총학 할 때 같이 감옥가고....이번에 운명처럼 한판 붙게 됐다.....참 기구한 운명의 만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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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선 예비후보 박영호 |
[나의 인생살이 75
철원에서 응원군이 내려오다.
모든 것이 갖추어 졌다. 이제는 열심히 뛰기만 하면 된다. 당시 열린우리당 에서는 공직후보자를 경선에 붙이기로 했다. 나는 열심히 뛴다면 경선 통과에 자신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내가 열심히 살았으니 이제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좋은 일을 할 것이라고 보고 밀어주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여론이 좋았다. 일부 반대자들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분평동 원룸 사무실을 대로변으로 옮기고 나는 원룸에서 기거 했다. 물론 산남동 어머니 집에도 가서 잤다. 경로당이며 상가며, 각종 행사장에 가서 부지런히 나를 알리기 위한 명함 배부작업을 했다. 돈이 없으니 오로지 몸으로 뛰어야 했다.
12월 말쯤이 돼 집사람이 방학을 하고 청주로 애들을 데리고 왔다. 우군이 온 것이다. 아마도 내가 당선되면 세비를 가져가려고 한 모양이다. 자기도 노력했다고 하려고....ㅋㅋㅋ 집사람은 절대로 사무실에는 나오지 않고 원룸에서 밥해주고 애들 어린이집 데려다 주고 등등의 일을 하겠다고 했다. 아마도 내가 보고 싶어서 온 모양이다. 아무도 없는 철원에 혼자 애들 데리고 있어야 무슨 낙이 있겠는가? 그리고 철원이 얼마나 추운가? 그러니 겸사겸사 해서 내려온 모양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명함을 배부하고 사무실에 나오니까 이 사람이 사무실 청소를 하고 있었다. 어럽쇼? 점점 다가오네~~~세비를 50% 줄려고 했는데 이러다가 다 빼앗기겠네.....나중에 선거가 끝나고 김태년(현 국회의원)이를 만났다. 태년이는 성남에서 당선 됐다. 태년이가 하는 말이 당선되고 첫 출근 하는 날 마누라가 3만원 주더란다. 차비나 하라고.....그동안 돈을 안 벌고 까먹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했다.
나는 속으로 기왕에 하려면 당신도 나가서 때도 밀어주고 명함도 배부하고 적극적으로 해서 내가 만약에 당선되면 그 때는 세비를 가져가도 좋다고 생각했다. 나의 욕심이요, 또한 아내의 일이라고 생각 했다. 세상을 지배하는 건 남자지만 남자를 지배하는 건 여자다! 틀리지 아니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종으로 살아간다. 이제 우리 사회는 모계중심으로 바뀌었다고 마누라한테 주장했다가 혼났다. 남자들이 아직도 까분다고 했다. 나보고 하는 소린가 하고 뒤를 돌아본다. 다행히 나는 아니란다. 휴~~~~
하루하루 즐거웠다. 워낙 내가 이런 일을 잘 했기 때문이다. 가끔 연설도 했다. 얼마나 당차게 했던지 그놈 참 쓸 만하네 하는 소리를 동네 분들께 들었다. 기분이 좋았다. 나는 정말로 국회의원이 되면 잘하고 싶었다. 가끔 친구들을 만나면 4.16일 국회에 있는 배지를 찾아서 달기만 하면 된다고 농담하며 다녔다. 하지만 속으로는 똥줄이 탔다.
중앙당의 흐름이 심상찮았다. 당시 충북에는 젊은 사람들이 대거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제천에는 박재구, 청주에는 나와 유행렬, 충주에는 성수희, 보은옥천영동에는 김서용....당시 우리는 신당추진 위원회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덤비고 있었다. 나름 좋은 사람들이요 충분히 국회의원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중앙당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충북에 관료들을 대거 영입해서 전략공천이거나 단수공천을 준다는 것이었다. 내가 중앙당 당직자 출신인데 이 정도는 알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이런 미친놈들! 예비후보 등록하기 전에 중앙당에서 틀림없이 작당을 해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을 내리 꽂을 것 이라는 생각을 직감적으로 했다. 그 일을 어떤 놈이 주도 하고 있는지도 알았다. 개놈들이었다. 나중에 열린우리당을 말아 먹은 도둑놈들이라 보면 딱 맞겠다.
▲ 파로호에서...
[나의 인생살이 76
열린우리당 직선 중앙위원이 되다.
나는 혼자의 힘으로 돌파하고자 했다. 1월 11일 임시전당대회를 통해 정동영의원이 당 의장이 됐고, 신기남, 이부영, 이미경 의원 등이 당 상임중앙위원이 됐다. 그리고 29일에는 충북지역 당 중앙위원 직선 선거가 공포 됐다. 충북에서는 2명의 중앙위원을 선출 했다. 나는 함께 하던 사람들과 상의를 했다. 가만히 있으면 틀림없이 경선 한번 치루지 못하고 들러리 될 것이니 우리가 힘을 합쳐서 해 보자고 했다. 당시 충북에는 지역구가 7개 있었는데 3개는 사고 지구당 이었다. 그래서 충주, 청주 상당구, 흥덕구, 보은옥천영동 이렇게 지역구에서 대의원을 선출했다.
당시 법적으로 선거구가 아직 분구되지 않아 나는 흥덕구로 신청을 했고 흥덕구에 배정된 대의원의 일정 지분을 달라고 했다. 노영민 선배는 인정해 주었다. 흥덕구에 배정된 전체 대의원 중에 과반을 노영민 선배가 차지하고 나와 행렬이 형은 각각 1/2씩 배정 받았다. 다시 말해 흥덕구 대의원의 1/4을 배정 받은 것이다. 내가 배정 받은 대의원 수는 19명 이었다.
나는 우선 힘을 모아 노영민(현 국회의원) 선배를 도당위원장으로 선출하고 나머지 한 석은 내가 하면 그래도 충북지역에 개혁세력이 다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충북에 전략공천이나 낙하산 공천을 막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노영민 선배가 도당 위원장 될 생각이 없는 거 같았다. 나는 출마를 결심했다. 충북의 총 대의원 수는 201명 이었다. 1인 1표 2인 연기명 투표방식(한명의 대의원이 후보자중 두 명을 선택해야 하는 투표방식)이 적용 됐다. 홍재형, 노영민, 박영호 이렇게 3인이 출마했다.
출마를 위해 기탁금이 700만원 이었다. 이 돈은 나에게는 엄청 큰돈이었다. 등록비도 겨우 마련했다. 등록마감을 5분 남겨놓고 나는 당시 나를 돕던 영아를 통해서 등록했다. 기적 같은 일이다.
그리고 선거운동을 해야 하는데 대의원들이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홍재형 후보는 전 경제부총리 출신의 현역 의원이고, 노영민 선배는 16대 총선에서 낙선했지만 6년간 지역구를 갈고 닦은 사람이고.....나는? 재야 운동하다가 중앙당에서 근무한 경력이 전부인데.....일반적 당 대의원들이 나를 알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당시 열린우리당 창당시절 충북에는 새천년민주당을 하시던 분들이 대거 열린우리당으로 넘어와 그분들이 나를 알고 있었다. 물론 내가 오랫동안 충북에서 민주화 운동을 했기 때문에 과거 야당을 하시던 분들과 인연이 많았다.
나는 전화로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다. 나의 경력을 말하고 열심히 할 테니 젊고 싱싱한 사람을 선택해서 충북과 대한민국을 바꾸자고 호소했다. 서서히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당시 충주지역의 대의원들이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충주에 살았다고 하니까 좋아 했다. 물론 성수희가 도와주었다. 재구 형이나 서용이 형은 대의원 배정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나의 몫으로 19명의 대의원이 있고.....아무리 표 계산을 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대의원 1명이 2명을 선택하는 투표라서 홍재형 의원 쪽의 대의원들이 다른 사람을 반드시 한 표 찍어야 되는데 자칫 노영민 후보를 찍으면 노영민 후보가 도당 위원장에 당선될 수 있으니 일부는 나를 찍어야 했다. 물론 내가 좋아서 찍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충주의 대의원들은 나를 한 표 찍고 나머지는 박영호 당선을 위해 홍재형을 찍는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어차피 옥천 쪽에서 홍재형 후보를 찍을 것이니까 박영호 당선을 위해서는 당연히 홍재형을 찍어야 했다.
보은옥천영동지역의 대의원 표심을 보니까 홍재형 의원을 도당 위원장 만들어야 한다는 분위기여서 홍재형 의원을 한 표 찍고 나머지 한 표는 부동으로 돼 있었다. 나는 여러 가지로 계산을 했다. 일단 현장에서 연설을 하는데 나는 연설에는 자신 있었다. 노영민 선배나 홍재형 의원보다는 내가 연설을 실감나게 잘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 연설을 통해 약 10%의 표심을 흔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노영민 선배 쪽은 한 표를 당연히 홍재형 후보를 찍을 것이고.....우리 표는 또한 당연히 나의 당선을 위해 홍재형 후보를 찍고.....그렇게 해서 일단의 표 계산이 됐다.
병수가 도와주었다. 낮 시간에 사무실에 와서 전화로 박영호 후보를 지지 해달라고 전화해 주었다. 너무 고마웠다. 병수야 고마워~~~
투표 당일이 됐다. 나는 기호 2번을 배정 받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연설 했다. 당시 이재정 총장이 대선자금 문제로 구속됐다. 나는 이 문제를 거론했다. 신부인 분이 정당, 선거에 나서서 구속되는 이런 정치는 없어져야 한다. 나는 깨끗하고 훌륭한 정치를 하고 싶다. 충북과 대한민국을 바꾸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고 열변을 토했다.
드디어 투표가 시작 됐다.
1월 29일 청주 연초제조창에서 열린우리당 충북지역 중앙위원 선거가 시작 된 것이다. 나는 이미 열린우리당 창당 임명직 중앙위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 다시 중앙위원이 되면 재선의 중앙위원이 되는 것이요, 당 내에서 나름의 발언권을 행사하고 싶었다. 개표가 시작됐다.
총 유효투표수 402(201명이 2표씩 행사하므로)표 가운데 홍재형 후보가 181표로 1위를 차지, 충북도지부장에 당선됐다. 나머지 한 명에는 당초 예상을 뒤엎고 정치 신인인 내가 117표를 얻어 2위를 차지, 104표를 얻는데 그친 노영민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는 이변이 연출됐다. 보은옥천영동지역의 대의원들이 나와 홍재형 후보를 선택한 것이다. 와~~~~~~~~~~
그날부터 지역 언론에서는 정치신인 박영호의 이변이라며 크게 뉴스로 다루었다. 나는 너무 좋았다. 당선된 이후로 나는 지역의 여러 행사에 참여했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고 격려해 주었다. 또한 지역의 기관단체를 방문 했다. 충북도청을 방문 했다. 당시 도지사는 한나라당 소속의 이원종 지사였다. 잠깐 인사나 드리려고 한다고 하니까 만나 주었다. 그러더니 나보고 대단하다면서 30분 이상의 시간을 내 주었다. 청주경찰서를 방문했다. 경찰서장이 나를 깎듯이 대우해 주었다. 내가 다니던 그 유치장이었던 곳이다. 민주화 되니까 세상이 좋아졌다. 나는 마음속으로는 당시의 형사들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오랜만에 지지자들과 엄청 즐겁게 술 한 잔 했다.
[나의 인생살이 77
국회의원 예비후보로 등록하다.
드디어 중앙당 공천심사가 시작 됐다. 공천심사 위원들은 총 15명으로 구성됐다. 이미 1월 2일부터 8일까지 후보자 접수가 이루어 졌다. 나는 청주 흥덕구(분구 예상지역)를 지역구로 해 신청했다. 그리고 직선 중앙위원까지 됐으니 나는 적어도 경선에 나갈 수 있겠거니 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인천시 행정 부시장을 하는 사람이 전략공천을 받기로 했다는 소문 이었다. 이 사람은 청주중학교, 경기고, 서울대를 나온 사람으로 전두환 정권 때 청와대 비서실 서기관과 청주 부시장을 거쳐 당시 인천시 행정 부시장이었다. 알고 보니 이 사람은 유인태 전 국회의원과 충북 출신으로 경기고 선후배 사이였다.
유인태씨 충북 제천 출신이다. 그러니 경기고에 충북 출신의 후배가 들어왔으니 얼마나 챙겼겠나. 유인태씨는 14대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같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 92년 대선 패배 후 영국으로 떠난 다음 이기택씨 등과 함께 민주당을 같이 했던 전직 국회의원 출신으로 노대통령 시절 초창기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 하던 사람인데 당시 열린우리당 내에서는 꽤 힘을 쓰던 사람이었다. 한편 유인태씨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친구 사이로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이강철씨와 잘 아는 사이인데(민청학련 사건 관련) 이강철씨는 당시 공천심사위원이었다. 이 사람을 통해 충북지역에 관료들을 대거 영입하고 있었다.
지역에서 아무리 뛰어다녀도 헛수고였다. 집사람은 개학 때문에 아이들을 데리고 철원으로 갔다. 이미 전략공천이라고 소문이 파다했다. 오재세씨는 자신이 전략공천을 받기로 했다고 소문내고 다녔다. 사무실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파리만 날렸다. 나는 어느 날 중앙당에 이강철씨를 만나러 갔다. 이강철씨는 내가 새천년민주당 중앙당 조직국에 있을 때 대구 경북 담당을 했기 때문에 당무감사를 가면 꼭 만나던 사람이다.
이강철씨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7년 6개월 감옥을 산 사람이다. 유인태씨 역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 받았던 사람이다. 그러니 두 사람이 얼마나 친했겠나. 당시 내가 대구를 내려가면 이강철씨는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나를 만나 꼭 노무현 후보를 당선시키자고 하면서 술도 한잔하고 그러던 사이였다. 나는 강철이 형님이라고 하면서 친하게 지냈다.
사실 노무현 후보가 대구 경북에서 일등 나온 데는 나의 공이 분명히 있었다. 선거인단 선정을 할 때 당시 지역구에서 올라온 선거인단을 똑바로 처리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인제 후보 쪽이 유리 했을 가능성이 농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대구 경북은 새천년민주당 당 세가 약해서 선거인단을 요건에 맞게, 즉, 지역(동별), 성별, 연령별로 뽑을 수가 없어서 특정지역에 사는 당원들을 마구잡이로 선정해 주었다. 나는 이것을 모두 바로 잡았다. 그랬더니 나중에는 사람이 모자라니까 이인제 후보를 돕던 지역위원장들이 할 수 없이 노사모나 이런 사람들은 선거인단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그랬는데 이강철씨가 나를 경선에도 안 붙이려고 했다. 틀림없이 유인태(당시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 이강철(당시 공천심사위원) 라인이 작동하고 있었고 유인태씨가 오재세씨를 전략공천으로 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충북 전역에 관료들을 끌고 들어왔다. 제천에는 해양경찰청장 하던 서재관씨, 충주에는 민자당, 한나라당 출신으로 충주시장 하던 이시종씨, 청원에는 정통부 차관하던 변재일씨, 청주 흥덕갑에는 인천시 행정부시장 하던 오재세씨 등을 낙하산 공천 하려고 했다.
괴산진천음성증평에는 권순각씨가 공천 됐는데 무슨 이유인지 공천을 빼앗아 버렸다. 보은옥천영동에는 김서용으로 공천을 줘 놓고는 재심을 통해 경선지역으로 분류했다. 자기들 마음 대로였다. 원칙도 기준도 없었다. 하루는 충주에서 몇 사람이 모여서 대책을 논의하고 있는데 서울에서 사람이 내려왔다. 어떤 사람보고 양보하라고 했다. 다른 자리를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회유가 시작된 것이다. 오로지 권력의 힘이 작동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는가? 이건 열린우리당이 아니었다.
공천을 국민에게 돌려준다고 나발 불고는 경선으로 치루겠다고 해 놓고 사기 치는 짓거리였다. 정동영씨가 당시 당 의장 이었다. 열린우리당이나 한명숙씨가 민주통합당의 대표로 있던 19대 총선 공천이나 모두 사기에 기초했다고 보면 틀리지 않는다. 정치신인들 데리고, 국민들을 상대로 사기 치는 사기꾼들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는다. 그러니 당이 망하지~~~~
계속 써 본다. 나는 강철이형 방에 가서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항의 했다. 처음에는 오재세씨를 모른다고 했다. 내가 책상을 걷어찼다. 사기 치지 말라고......더러운 짓거리가 행해지고 있었다. 그럴 줄 알고 내가 중앙위원을 하고 있는데도 이 지랄을 하고 있었다.
나는 종원이 하고 청년운동 선배이신 김근태의원(당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을 찾아갔다. 저녁쯤에 도봉구에 있는 사무실로 찾았는데 인재근 사모님과 함께 있었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경선이 이루어지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김근태 원내대표는 상임중앙위원이었다. 나는 억울한 마음을 가감 없이 털어 놓았다. 그리고 이런 세상이라면 다시는 독립운동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생각하면 객기를 부린 거 같다. 내가 국회의원 하려고 인생을 산 것이 아닌데....당시에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김근태 선배님이 돌아가시고 내가 이 말을 했던 것을 엄청 후회 했다. 내가 전국연합 활동을 할 때 의장으로 모시고 있던 이창복 의원이 당시 재출마를 포기하고 공천심사위원 이셨는데 찾아가서 경선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다. 모두 도와주신다고 하셨다.
3월 5일 한 밤중 이었다. 사무실에서 어떻게 해서든 경선을 해야 한다고 준비하고 있었다. 중앙당의 후배로 부터 전화가 왔다. 방금 상임중앙위원회 회의가 열렸는데 청주 흥덕갑을 경선지역으로 결정했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6시에 다시 회의를 한다고 했다. 나는 기분이 묘했다. 왜 이들이 아침에 다시 회의를 할까?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상철이한테만 말했다. 아침회의에서 뒤집어 질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3월 6일 오전 중앙당에서는 청주 흥덕갑 지역구를 오재세씨로 단수공천 한다고 발표가 났다. 올 것이 온 것이다.
아침에 사람들이 몰려왔다. 나는 중앙당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공천심사 기획단에서 조사한 여론조사 문건을 입수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기초로 공천재심사를 요구 했다. 당시 총선기획단(단장 김한길)이 조사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 1월 29일 박영호 17.3%, 오재세 15.5%로 조사됐으며 3월 초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선 박영호 23.7%, 오제세 23.8%로 집계됐다. 여론조사가 이렇게 나오니 당연히 3월 5일 상임중앙위원 조정회의에서 청주 흥덕갑을 경선지역구로 했던 것 아닌가? 그런데 3월 6일 새벽 회의에서 정동영 의장은 이를 뒤집었다. 더러운 짓거리다.
내가 서울로 항의 하러 간 사이 청주에 있던 사람들은 우리 아버님 어머님 등과 함께 충북도당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강력 반발했다. 국민참여경선을 한다고 해놓고 하지 않는 것은 사기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3월 10일쯤엔가 중앙위원회가 열렸다. 열린우리당의 공천에 대한 최종 확정은 중앙위원회가 가지고 있었다. 나는 회의에서 신상발언을 했다. 공개한 여론조사 내용과 내가 아무 하자가 없는데 어찌해서 전두환 시절 청와대에서 서기관을 지낸 사람하고 민주화운동을 거쳐 감옥까지 갔다 온 사람하고 경선도 못하냐? 이것이 열린우리당 이냐? 내가 중앙위원이다. 경선도 거치지 못할 사람이 중앙위원이라면 중앙위원회 전체의 자존심의 문제 아니냐? 등등으로 3분 정도의 발언을 했다. 그리고 표결이 이루어졌다. 당사자가 관련된 문제라고 나는 표결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나는 밖으로 나갔다. 나가면서 보니까 저쪽 구석에 오재세씨가 앉아 있었다.
표결이 이루어 졌다. 33대 11로 오재세후보 단수공천 건이 부결 됐다. 나머지는 통과 됐다. 너무도 좋았다. 나는 사무장을 보던 상철이를 통해 선관위에 예비후보 등록을 했다. 경선이 되면 나는 분명히 이길 것을 확신 했다.
당시 중앙위원들의 상당수는 여성들 이었는데 이들은 국회의원 비례대표를 꿈꾸고 있었기 때문에 정동영 의장의 눈 밖에 나면 안 되는 사람들 이었다. 그날 회의에는 여성중앙위원들이 많이 참석 했다. 다른 중앙위원들은 공천을 받고 지역구 활동에 들어갔기 때문에 많이 참석하지 못했다. 나의 연설에 많은 중앙위원들이 공감을 했던 모양이다.
회의가 끝날 때 쯤 해서 정동영 의장이 청주 흥덕구 등 몇 군데의 뒷 처리를 상임중앙위원회에 위임해달라고 했다. 나는 반대 했지만 회의가 어수선 틈을 타 그냥 넘어갔다. 모두 지역구에 가기 바빴다. 정동영은 마지막 까지 꼼수를 쓰고 있었다. 나는 읽고 있었다.
그런데 3월 9일 부터 국회가 난리가 났다. 2004년 1월 5일 새천년민주당의 조순형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언급하면서 본격화된 탄핵은, 같은 해 3월 5일 대통령이 선거중립의무 위반과 측근비리 등에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하지 않을 경우, 새천년민주당은 탄핵소추안을 발의하겠다는 특별기자회견으로 발전 했고, 급기야는 대통령이 사과를 거부하자, 3월 9일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공동으로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탄핵저지를 위한 국회 본회의장 농성에 들어갔다. 3월 11일 오후 탄핵소추안이 처음으로 국회에 상정됐으나, 열린우리당의 물리적 저지로 무산됐다. 이러는 와중에 중앙위원회가 공천권을 가지고 논쟁을 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한심했다. 하지만 절차가 있으니 이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나는 3월 11일 봉쇄된 국회 본청으로 들어갔다. 새천년민주당 시절 가지고 있던 국회출입증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니 살벌했다. 국회 밖에서는 탄핵을 막아야 한다고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이 집회를 하고 있었다. 당일 나는 국회에서 잠을 잤다. 상호하고 같이 말이다.
그런데 3월 12일 새벽 한나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에 진입해서 단상을 점거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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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매 진행 중인 어머니 |
[나의 인생살이 78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 통과되다. 공천에서 떨어지다.
전날 밤을 국회에서 잔 나는 아침부터 초 긴장상태에서 당직자들과 함께 국회 로텐더 홀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의 본회의장 진입을 막았다. 여야 의원들의 대치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오전 11시 5분쯤 어디선가 검정색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쫙 깔리기 시작했다. 본회의장이 중계되고 있었는데 나는 직감적으로 경호권이 발동됐음을 알았다.
박관용 국회의장이 국회 경위들과 함께 본회의장에 들어와 경호권을 발동하고 이어 의장석에서 농성 중이던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차례로 끌어내 시작했다. 나는 사력을 다해 우리당 의원들을 본회의장으로 밀어 넣었다. 힘이 모자랐다. 끌려나온 유시민 의원과 로텐더 홀에서 엄청 울었다.
이 장면은 두고두고 정치권 뉴스에 자료화면으로 나왔다. 얼마지 않아 탄핵소추안을 상정해 제안 설명도 유인물로 대체한 채 무기명 투표에 들어갔다. 11시 55분 한나라당·새천년민주당·자유민주연합 등 투표에 참석한 195명의 야당 의원들 가운데 193명의 찬성으로 탄핵소추안이 기습적으로 가결된 뒤, 헌법재판소에 소추의결서가 접수됐다. 이로써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수행이 정지됐다.
참으로 황당했다.
탄핵안이 헌재로 넘어가고 나서 당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총선 공천권 관련해서 전쟁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대통령이 탄핵 됐는데 무슨 공천전쟁이냐 하면서 자포자기 상태에 있었다. 3월 13일 당에서 연락이 왔다. 정동영 의장은 상임중앙위원회에서 청주 흥덕갑 지역에 대해 면접을 실시하라고 한 것이다. 나는 황당했다.
중앙위원회에서 오재세 후보의 단수공천이 부결됐으면 경선을 붙일 일이지 면접이 도대체 말이 되는가? 그 공심위원들이 자신들이 이미 단수공천이라는 결론을 내린 상태인데 이를 다시 면접으로 한다고 결과가 바뀔리 만무였다. 정동영의장의 꼼수였다. 나는 반대하고 싶었다. 소송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탄핵소추가 됐는데 당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이 마음에 놓이지 않았다. 나는 면접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13일 밤에는 눈이 엄청 왔다. 나는 눈 때문에 고속도로가 막힐까봐 13일 저녁에 서울에 와서 잤다. 14일 오전에 청주 흥덕갑 지역구에 대해 공천신청을 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면접을 실시했다.
면접이 이루어 졌다. 몇 가지 물어보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기숙씨가 나한테 국민의 힘 회원들과 싸운 것을 물었다. 나는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지역에서 활동하던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면접 후 공천심사위원들 간의 투표가 있었다. 우선 단수공천과 경선에 대한 투표였다.
결과는 10대 4로 단수공천으로 하고 두 번째 단수 후보는 오재세로 공천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똑 같은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미 짜인 각본대로였다. 나는 조기숙씨가 경선을 해야 한다는 쪽에 투표를 했는지 알 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공심위원이라면 객관성은 유지 했어야 한다고 본다. 그 사람은 그 뒤에 참여정부 청와대에서 홍보수석으로 일했다.
허무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해 왔는데 아무런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무참히 깨지다니......그날 저녁에 청주로 돌아와 한 없이 울었다. 대통령도 탄핵소추안이 통과돼 직무가 정지 됐다.
나는 바로 예비후보 사퇴를 했다. 그리고 오재세 후보를 돕기로 했다. 15일 저녁에 오 후보가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나에게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나는 기꺼이 맡았다. 그리고 기자회견도 함께 했다. 심플한 승복인지, 아니면 속창아리 없는 짓인지 나는 솔직히 분간이 안 갔다. 대통령 탄핵만 아니었어도 뭔가를 생각해 봤을 텐데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오재세 후보는 참 이상했다. 공직자 출신이라 그런지 나하고 스타일이 맞지 않았다. 사무실에는 내가 학생 운동할 때 비권으로 반대편에 있던 사람들이 와서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 과거 민정당, 민자당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나를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나는 나를 지지하던 지지자들한테 꼭 오재세 후보를 도와주라고 했다. 우리 켐프 해산식 때도 오재세 후보를 불러서 인사 시켰다.
대통령이 탄핵소추로 인해 직무정지가 되자 엄청난 시민들이 저항에 나섰다. 촛불을 들고 광화문을 뒤 덮었다. 많게는 40만 명이 참여하기도 했다. 틴핵소추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은 열린우리당 지지로 나타났다. 또한 한나라당이 지난 대선에서 차떼기로 돈을 뿌렸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도 무척 실망했을 것이고, 나아가 노무현 대통령이 뭔가 새롭게 대한민국을 이끌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힘이 나지 않았다. 카드회사에서는 돈 갚으라고 독촉전화가 빗발쳤다. 국회의원 나오려고 한 사람이 돈이 없냐며 자존심을 긁기도 했다. 나는 카드 빚 독촉이 그렇게 무서운 줄 처음 알았다. 사실 나는 출마를 준비하면서 돈이 없어서 카드를 돌려 막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삼성카드는 만들지 않는다.
당시로 각종행사까지 포함해서 약 7개월 정도 움직였는데 약 7천만 원 정도 쓴 것 같다. 사무실 임대료, 일부 직원 인건비, 중앙위원 선거 공탁금과 선거운동비용, 홍보물 제작, 전화 통신료.....누구에게 돈을 뿌리고 하는 것이 없어도 기본적으로 나가는 비용이었다. 돈 없는 사람은 선거를 할 수가 없었다. 오세훈 법이 통과돼 좋은 점도 있지만 예비후보 단계에서는 후원금도 받을 수 없으니 이거는 돈 없는 사람은 출마하지 말라는 것과 똑 같았다. 나는 차라리 후원금을 걷을 수 있도록 하되 쓰는 것을 투명하게 하는 것이 돈 없는 사람들이 선거 하는데 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십시일반도 엄밀히 따지면 선거법 위반인 것이다.
돈 없이 정치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해보면 안다.
주변사람들 한데 민폐 끼치지 않는 그런 정치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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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와 함께 |
[나의 인생살이 79
총선에서 알바를 하다.
무기력이 극단적으로 밀려 왔다. 오재세 후보의 사무실에 가봤자 할 일이 없었다. 아직 공식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전 이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나는 일주일 정도 청주에 머무르다가 상철이 한데 사무실 뒷정리를 맡기고 철원 집으로 갔다. 집에 가니 집사람은 아침에 출근하고 은서와 상현이는 초등학교 입학해 등교하고.....봄날이라 나른하고......멘붕이 바로 이런 것 이었다. 동송읍 내에 나가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모자 눌러쓰고 평상복에 읍내를 걸어 다녔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나는 선거에 출마했다가 떨어진 사람들이 멘붕 상태가 되는 상황을 잘 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거나 등산을 한다. 이번 19대 총선에서 많은 동료들이 출마를 준비하다 부당한 이유로 나처럼 경선도 못해보고 낙천당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나는 그들의 삶을 걱정한다. 선거에 출마하려고 다니던 직장도 그만 두었을 것이고, 그동안 벌어놓은 돈도 많이 썼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도전을 위해 다시 일어서야 한다. 그들에게 격려를 보낸다.
매일 카드회사에서 전화가 걸려온다. 갚을 돈은 없고.......선거에 떨어지면 패가망신 당한다는 속설을 실감하며 하루하루를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앙당에 있는 선배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뭐하냐고 물어 보았다. 멘붕이요.......집에서 빨래, 설거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중앙당 선거대책위원회에 나와서 알바라도 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잠시라도 마음을 풀라고 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다음날 중앙당으로 갔다. 열린우리당 총선 대책위 조직본부 중부지역 담당을 맡으라고 했다. 명색이 중앙위원인데....쪽팔리는 것도 없었다.
충북지역의 다른 경선준비자들은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 벌써부터 각종 기관에 감사 등으로 나갔다. 재주도 좋았다. 끝까지 버틴 나는 결국 참여정부 시절 아무 자리도 가지 못하고 당에서 있었다. 괘씸죄인가 보다. 총선 대책위에서 아르바이트 대가로 150만원을 받았다. 이 돈으로 카드회사 빚 독촉에 일단은 대응했다. 솔직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매일 술로 보냈다. 점차로 마음이 잡혔다. 과정에서 많은 선후배들이 힘이 됐다. 승기형, 동규형, 홍섭이형, 남주형, 기현이, 종곤이, 옥주, 향엽이.....정말 많은 힘이 돼 주었다.
총선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민주개혁 세력이 해방 후 처음으로 의회권력의 과반수를 넘기는 괴력을 발휘했다. 물론 더 많은 당선자가 나올 수 있었지만 정동영 의장의 노인폄훼 발언이 일부 왜곡되게 언론에 보도되면서 겨우 152석을 얻었다. 선거에 당선된 사람들을 두고 탄돌이라는 유행어가 나오기도 했다.
나는 모든 선거에 나온 후보들의 당선은 그 후보와 그를 지지한 사람들의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외부의 상황이란 어떻게 변할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 당선된 사람들을 단순히 탄돌이라고 하는 것은 배 아픈 사람들의 질투이거나 혹은 그 들의 당선을 다른 사람의 공으로 돌려 거기서 이익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의 괴변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내 친구는 서울시의원 3수만에 당선됐는데.... 한번은 김대중 대통령 아들들 비리 때문이요, 한번은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들 비리 때문에 다 잡았던 당선을 놓쳤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되는가? 어찌됐건 선거는 그 사람의 노력의 결과라 하는 것이 맞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논리를 펴고 다녔다. 노무현 아니었으면 니들이 당선됐겠냐고. 그렇지 않다 국민들이 선택한 것이다.
나는 선거과정에 청주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솔직히 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사람도 나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첫 단추를 잘 채울 수 있도록 공천경합 과정에 대해 깨끗이 승복했고, 기자회견도 함께 해주고......그렇게 해서 그 사람에게 해 줄 것은 다 해 주었다. 무릇 후보자 경합과정에서 이긴 사람들은 떨어진 사람에 대해 뭐든지 해줄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승리를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서다.
생각해 보라! 만약 선거 승리 했는데 이 성과가 경선에서 진 사람이 도와줘서 당선됐다고 한다면 다음 선거에는 본인은 출마하지 말고 자신을 도와준 사람을 후보로 해줘야 하는 것이 이치 아닌가? 모든 논리는 승리한 자의 것으로 통하게 돼있다. 도와줘서 그 사람이 당선되면 경선에서 진 사람은 사라져 주는 것이 예의이다.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 측이 패배의 원인중의 하나를 안철수로 돌리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이런 사람들을 염치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뭐 권력을 나눠먹기 하려고 DJP 연합처럼 한 것도 아니고.....후보단일화 협상과정에서 맞지 않아 안철수 예비후보가 일방 사퇴한 것인데 뭐가 문제라는 건가? 그리고 안철수가 안도와 줬냐? 도와주고도 욕먹는 안철수를 보면 참 안타깝다. 나는 문재인 후보 측을 승자의 오만이라고 비판한다. 출마도 못한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 따위 식의 비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선거판에서는 일반적으로 경선에서 진 사람을 선거대책위원장으로 한다. 나는 반대한다. 고문이나 자문 정도 하면 된다. 어떻게 경선에서 진 사람이 선거를 책임지고 이끌 수 있는가? 빛 좋은 개살구이고 땜빵식 협박이다. 니가 그렇게 도와주지 않으면 다음에 니가 하는 일에 도움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무언의 협박인 것이다. 솔직히 누가 하고 싶겠는가? 대선과정을 봐라 누가 경선에서 지고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는가? 솔직하자! 나는 총선이든 지방선거든 모든 선거에서 경선에서 떨어진 사람보고 선거대책위원장 맡으라고 하는 협박을 하지 말기를 당부한다. 후보자가 된 사람이 경선에서 진 사람을 선거에 활용하고 싶으면 잘 대해 주고 삼고초려 하면 된다.
총선에서는 많은 친구들이 당선 됐다. 전대협의 친구. 후배들이 12명이나 당선됐고, 한청협을 같이 했던 광주의 강기정, 관악에 유기홍 등도 당선 됐다. 또한 전민련, 전국연합을 함께 했던 선배들도 많이 당선 됐다. 부러웠다. 어느 날 친구가 출마한 지역구에 놀러 갔다. 친구가 하는 말이 출마 안했냐고 의아해 했다. 면접경선에서 졌다고 말했다. 마음이 아팠다.
선거는 그렇게 끝났다.
이제 나는 다시 무엇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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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호가 즐겨 찾는 의암호 낚시터 |
[나의 인생살이 80
청와대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다.
총선이 끝났다. 할 일이 없었다. 솔직히 당선된 친구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당직으로는 중앙위원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지만 선거 후에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어차피 의원총회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총선이 끝나고 얼마 후 헌법재판소는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심판을 기각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정지가 풀리고 대통령으로의 권한을 회복했다. 얼마 후 청와대에서는 당선자들과 중앙위원들을 합동으로 청와대로 만찬초청을 했다. 나도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1호 당원으로 입당했다. 드디어 열린우리당이 집권당이 된 것이다. 그간에는 내연의 관계라고 유시민의원이 말했다. 말도 참 잘 만들어 낸다.
그날은 너무도 기분 좋았다. 나는 중앙위원 자격으로 난생 처음 대통령이 주관하는 청와대 만찬자리에 참여하게 됐다. 한편으로 가슴 뿌듯했다. 식사가 나왔다. 중식이었는데 코스요리였다. 샥스핀도 나왔다. 나중에 언론에 엄청 씹혔다. 그리고 와인도 나왔다. 건배도 했다. 얼마쯤 흥이 올랐을까? 누군가가 대통령께 노래를 청했다. 그리고 386 젊은 국회의원들과 중앙위원들이 단상으로 나가게 됐다. 한 40여명 됐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아~~~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이제 우리가 국가권력을 담당하게 되다니.....어깨가 무거웠다. 가슴이 뭉클하면서 눈물이 나왔다.
5. 18 묘역에 대통령께서 참석하셨다. 그 자리에서도 우리는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제창이었다. 그런데 이명박정부 이후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못 부르게 했다. 이넘들은 5.18 묘역에서 니나노를 부르고 싶었을 것이다. 옳지 못한 정권이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그러지 말기를 당부한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했다. 그리고 님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지 않고 꼼수로 합창을 했다. 그것이라도 하니 다행이다.
총선이 끝났는데 중앙당의 후배가 나보고 청주에서 이상한 소문이 나돌아 중앙당에 까지 들린다고 했다. 소문인 즉, 내가 오재세 후보를 돕지 않은 이유가 돈 1억 원을 요구했는데 주지 않아서 선거운동을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환장할 일이었다. 나를 아주 매장하려고 작정한 소문 이었다. 나는 이 소문을 누가 냈는지 추적했다. 그리고 그 소문을 입 밖으로 낸 사람들한테 전화해서 명예훼손으로 고발 할 테니 그렇게 알라고 했다. 그리고 오재세 의원을 만났다. 5.18 행사 후 식사가 끝나고 나는 우선 노영민의원한테 이런 소문이 있는데 내가 환장하겠다. 그러니 내가 오재세 의원을 불러 올 테니 증인이 돼 주라고 했다.
때마침 오재세의원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를 불렀다. 그리고 노영민의원이 있는 자리에서 오재세 의원한테 물었다. 내가 당신한테 선거전후 해서 돈을 1원이라도 요구한적 있냐? 그랬더니 없다고 말했다. 나는 노영민 의원한테 이 말에 대해 증인이 돼 달라고 부탁했다. 아주 더러운 정치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훗날 나는 이와 관련해 노영민의원이 민평련 모임에서 내가 충북도당 사무처장으로 발령 나지 않은 이유를 누가 물으니까 박영호한테 이런 소문도 있었다는 말을 했다는 소리를 당시 회의에 참석한 후배한테 들었다. 나는 노영민의원한테 항의했다. 당신이 있는 자리에서 오재세 의원이 아니라고 했으면 만약에 누군가가 그런 애기를 하면 자기가 나서서 오재세의원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증언을 서주기를 바랬는데 이제는 본인이 그런 말을 건네고 다녔다. 너무 화가 났다. 내가 듣기로 그 자리에 있던 전국연합의 선배는 박영호가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고 전해 들었다.....내가 충북도당 사무처장으로 왜 가지 못했는지는 나중에 기술 한다.
정치를 하다보면 참으로 여러 가지를 겪는다. 그중에 아마도 허위사실이 진실인 것처럼 시중에 나 돌아 다 닐 때가 가장 환장할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마타도어를 만들어 소문내고 다닌다. 그래서 정치판이 더럽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견디지 못하면 정치인이 되지 못한다. 정치인은 만능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정치인에 대해 존경하는 그런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아직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반드시 그 날은 오리라~~~~
나는 중앙위원을 하면서 나름 소신대로 발언했다. 정동영 의장이 회의를 잘 못 진행하거나 할 때는 꼭 손들고 의장을 외쳤다. 과거 나는 전국연합 회의 할 때도 저요! 를 외쳤다. 내 별명이 저요 다. 당헌을 개정하는 작업이 있었다. 당헌 당규의 최종심의 의결권이 중앙위원회에 있다. 당헌 전문을 아무리 읽어봐도 통일에 대한 내용이 한마디도 없었다. 나는 당헌 전문에 평화통일을 위해 열린우리당이 노력한다. 라는 문구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졌다.
내가 생각건대 큰일을 한 것 같다. 하지만 1기 중앙위원회는 오래 가지 못했다. 정동영 의장이 노인폄훼 발언으로 사퇴하고 차순위 상임중앙위원이 당 의장을 맡는 상황이 반복됐다. 결국 1기 중앙위원회는 그 임기를 다하지 못하고 도중에 중앙위원 총사퇴를 선언했다. 나의 임기도 마쳐졌다.
[나의 인생살이 81
다시 월급 받는 생계형 당직자가 되다.
총선에 나가 국회의원이 되고자 했으나 공천에서 탈락하고 총선 선대위 알바를 했다. 총선은 열린우리당이 152석으로 과반을 넘기면서 끝났다. 선거가 끝났으니 나는 할 일이 없었다. 이제 다시 백수가 된 것이다. 돈은 없고 카드회사에서 돈 갚으라고 전화는 오고....환장할 일이었다. 나는 다시 철원 집으로 갔다. 청주 사무실은 상철이 한테 뒷정리를 맡겼다. 4월 중순이니 날씨가 얼마나 좋은가? 집사람과 아이들은 모두 학교가고 나는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다. 어디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지만 돈이 한 푼도 없었다. 물론 초등학교 다니는 애들을 돌보기도 해야 했다. 환장 하겠더만요.....
5월 초 중앙당에서 전화가 왔다. 나를 월급 받는 당직자로 발령을 냈다는 것이다. 국민통합위원회 부국장으로 발령을 냈단다. 당시 총선 대책위원회에는 약 300명 이상의 실무자들이 있었다. 총선 후에 당직자를 전부 새롭게 선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름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그러니 나를 당직으로 발령 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편으로 총선 공천에서 떨어진 다른 사람들은 공공기관에 감사나 사장 등으로 많이 발령이 났다. 나도 솔직히 내심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는 그런 전화를 받지 못했다. 아마도 나를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서 일 것이다. 아마도 나는 친노 인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속칭 뺀지인 것이었다.
솔직히 서운했다. 나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는데 열심히 했는데....그리고 총선 출마도 못하고, 당 중앙위원까지 하고 있으니....그리고 실무력이나 집행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나는 기분이 묘했다. 중앙위원이면서 한편으로는 월급 받는 당직자라~ 그것도 부국장이라~친구들은 전부 국장인데~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이 쪽팔림도 없었다. 누가 나를 당직자로 추천해서 임명까지 됐는지는 나중에 선배한테 들었다. 감사한다.
그렇게 해서 나는 월급 받는 당직자가 됐다. 월급을 받으니 좀 살 것 같았다. 우선 받는 월급으로 총선 준비하면서 진 빚을 갚기 시작했다. 그 빚을 청산하는데 약 4년이 걸렸다. 솔직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국민통합위원회에서 하는 일은 사안별로 이루어 졌는데 당시 쟁점이 됐던 것이 핵폐기물 처리장 건립에 대한 것이었다. 모든 지역에서 반대했다. 산자부 에너지관리본부장과 한수원이 파트너였다. 나는 출장을 자주 갔다. 당시 국민통합위원장은 이미경 의원이었고 부위원장은 연천포천 출신의 전대협 동기인 이철우 의원이었다. 나는 마음이 좀 편했다. 형근이 형이 국장을 맡았다.
출장 가서 원자력 발전소 안에까지 들어가 봤다. TV에서 보던 그런 장면이 눈앞에 있었다. 좀 떨리기도 했다. 저준위 방사성 물질을 지하에 저장해야 하는데 지역에서 반대하니 이것을 해결해야 했다. 정부에서는 지역에 인센티브를 주는 공약을 내걸었다. 나중에 경주가 유치에 성공했다.
나는 잠시 중앙당 사무처 직원을 하다가 2004년 8월 말쯤 열린정책연구원이 창립되면서 연구원 대외협력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무실은 여의도 증권거래소 맞은편에 있었다. 창립멤버가 된 것이다. 연구원에서는 당의 여러 가지 정책을 만들어 냈다. 나는 우리 연구원과 타 연구기관과의 협력 업무를 맡았다. 독일의 아데나워 재단이나 에버트 재단 관계자들과도 협력을 이루어 냈다.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기니 조금 살 것 같았다. 당 사무처에서 일하면 당직자들이나 당 지도부와 부딪칠 것 같았다. 마음이 편치 못했다. 연구원에는 동규형, 옥주, 승환이형, 운경이형, 현태, 금일이 등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함께 일했다. 좋았다. 2005년 연구원에서는 최고지도자 과정을 개설해 운영했다. 나는 2기로 열린우리당 최고지도자 과정을 등록했다.
당시 강사가 정동영 전 의장과 황우석 박사가 나왔다. 정동영 전 의장이 강사로 오는 날 나는 수강을 했다. 참석자들과 악수를 하면서 왔다. 내 앞에 오더니 천하의 박영호 동지가 여기 있군요 했다. 나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공부 좀 하려고 왔다고 응수했다. 내가 그렇게 한 이유는 지난 총선 공천과정에 정동영 전 의장이 장난을 쳤다는 깊은 불신 때문 이었다. 다음으로 황우석 박사가 강사로 왔다.
당시 황우석 박사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 상태였다. 황박사는 과학의 애국주의를 역설했다. 나는 사실 황박사가 줄기세포로 장기를 만들어 이식을 성공하게 되면 대장에 문제가 있는 아들 상현이 한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꽝이 됐다. 상현이는 내가 연구원에 있을 때도 수술을 했다.
2005년 창당 1주년을 맞아 광진구에 있는 W호텔에서 큰 국제 행사를 개최 했다. 돈이 엄청 들었다. 그래도 많은 외국의 전문가들을 모셔서 한반도의 통일에 대해 토론회를 개최 했다. 또한 당원들에 대한 교육도 연구원에서 담당 했다. 정책연구원은 전액 국고보조금으로 운영된다. 정당에 지급되는 지원금의 30%를 쓰는 곳이다. 정당의 정책연구원을 나는 더 크게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정책연구원이 중앙당의 자금을 편법으로 운영하는 창구로 활용하고 있는데 나는 이것을 고치기를 바란다.
그러고 보니 나는 당직을 하면서 여러 군데를 거쳤다. 크게는 사무처, 연구원, 국회, 정책위 .....아마도 이렇게 당직을 두루두루 거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무처에서는 정세분석국, 조직국 등을 거쳐봤고, 연구원에서는 대외협력국장, 국회에서는 정책연구위원, 정책위에서는 정책국장과 노동전문위원.....참 많이도 돌아 다녔네....
배운 것도 많고 스스로 모자람도 느꼈다. 그래서 사람은 배워야 한다. 공부해라! 결국은 자신의 것이 된다. 공부는 나를 위해서든 남을 위해서든 꼭 필요한 것이다. 먹고 살려고도 해야 하고 자신의 정신세계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도 해야 한다. 외우는 것도 해야 하고 이해하는 것도 해야 한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일차적이라 하겠다. 지금은 게을러서 많이 못 읽는다. 이럴 때 양심수로 감옥 가서 딱 6개월만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나는 이제 감옥가면 전력이 많아서 집행유예는 어렵고 아마도 최소 1년 이상은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가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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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5cm 의 토종붕어, 이런 놈이 잡히는 날이면 SNS는 온 종일 시끄럽다. |
[나의 인생살이 82
차세대 정치지도자 과정에 선발돼 호주를 방문 하였다.
2005년 7월 국가경영전략연구원이라는 곳에서 호주의회의 의원 연구단체인 아셈(ASEAM)이 초청하는 한국 차세대 정치지도자 과정의 방문단을 모집한다는 공문이 나왔다. 이 연구원에서는 한국의 정당에 있는 사람들로 차세대 정치지도자들을 육성하는 프로그램을 외국의 각 기관 단체와 공동으로 하고 있었다. 미 국무부가 운영하는 프로그램도 있고, 호주, 중국 등의 국가기관이나 의회와 교류하고 있었다.
나는 신청서를 냈다. 이력서와 살아온 과정, 그리고 앞으로 정치활동 계획 등을 써 냈다. 나는 한국의 386의 유망한 정치인임을 강조 했다. 선발됐다. 당 에서는 송영길의원(현 인천시장)과 부산의 정진우 중앙위원 등이 선발 됐고, 한나라당, 민노당의 의원과 당직자들도 선발 됐다. 9명인가 됐다.
8월 초 우리는 2주 일정으로 호주로 떠났다. 비행기를 타고 싱가폴 공항에서 갈아탔다. 엄청 멀었다. 첫날 시드니에 도착했다. 그림에서나 보던 오페라 하우스를 보았다. 호주의 수도는 시드니에서 켄버라로 옮겨가 있었다. 당시 우리도 신행정수도 이전 사업이 진행되고 있어서 많은 공부를 하게 됐다. 이번 방문은 우리가 스케줄을 짠 것이 아니고 호주 측에서 스케줄을 짰기 때문에 엄청 빡빡했다.
여러 군데 포럼에도 참가하고 그들의 정치문화도 설명 받았다. 시드니에서 다시 켄버라로 갔다. 켄버라는 모이는 장소라는 뜻인데 허허벌판에 새롭게 만들어진 인공도시였다. 호주 의회가 그곳에 있었다. 호주는 의원내각제 나라였다. 호주 국회에서 회의하는 모습도 봤다. 회의도중 의장이 우리를 소개해 주었다. 한국의 차세대 정치지도자들이 방청 왔으니 박수로 맞아달라는 그런 멘트를 했다. 호주 영어는 발음이 미국식과 달라서 알아듣기 어려웠다. 내가 이 말을 이해 한 것은 순전히 나의 직감이다.
회의과정을 한참 지켜봤다. 우리나라와 상당히 달랐다. 어떤 의원이 장관과 토론을 하는데 소수파 의원이 야지를 하고 있었다. 그랬더니 의장이 000의원 오더~~~라고 경고 했다. 그러니 그 의원이 조용했다. 그러니까 그 옆에 있던 의원이 또 야지를 했다. 그런 식으로 돌아가면서 자신들과 다른 입장에 대해 야지 하는 것 이었다. 만약 의장의 오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의장은 그 의원을 퇴장시킨단다. 재미있었다.
캔버라의 밤은 그야 말로 시골 분위기였다. 아무런 유흥꺼리가 없었다. 술파는 곳도 거의 없었다. 몇 군데 있는데 가보니 맥주한잔, 양주 한잔 놓고 대화하고 그런 것이 전부였다. 우리처럼 양주를 병으로 먹는 사람들은 없었다. 주한 호주대사관에도 초청받아 갔다. 그리고 서부의 퍼스라는 곳에도 가봤다. 그리고 호주 서부내륙의 켈거리볼더라는 시골 광산촌에도 가 봤다. 달에서도 보인다는 거대한 웅덩이가 있었다. 그곳은 철강을 캐내는 곳이었다. 엄청 컸다.
호주 원주민을 봤는데 이렇게 표현하면 안 되지만 리얼하게 표현하자면 꼭 원숭이와 비슷했다. 호주 이민세력들은 초창기 호주 원주민을 짐승인줄 알고 학살을 자행했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은 호주 이민세력들이 원주민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원주민들을 쿼터제로 해서 의회에 진출시키고 있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고 이를 고치려고 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우리나라의 극우세력들이나 일본의 극우세력들이 지금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반성하지 못하고 니들도 그랬잖냐? 하는 식의 발언은 악을 최선으로 보는 자들의 넋두리다. 우리는 선을 추구하되 최선이 되게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양심에 찔리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잘못을 했으면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이다.
솔직히 나는 과거에 전두환이 정권을 잡았을 때 교통신호를 위반하기도 했다. 그리고 속으로는 니들은 사람을 죽였잖아 나는 기껏해야 신호위반 했는데....하면서 자만했다. 잘못한 일이다. 반성한다.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해 반성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나쁜 것에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것에 대해 자신을 비교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나도 그렇게 해보련다. 독일에서는 나치를 찬양하면 처벌 받는다. 나는 그런 나라가 좋다. 우리나라도 그런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
호주 방문은 나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정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의원내각제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하게 해 주었다. 그렇게 약 2주간의 호주 방문이 끝났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2006년 대의원대회에서 정동영 의장이 당선되고 나서 당직 전체의 순환이 일어났다. 나는 정책연구원에서 국회직으로 발령을 받았다. 국회직은 원내 교섭단체가 되면 일정한 숫자의 사람을 국회정책연구위원이라는 직책으로 1급, 2급, 3급, 4급 등의 직급으로 원내에서 정당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교섭단체의 정당에서 국장 이상을 하면 2급 이상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원내대표 산하에 전략기획실 기획국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원내 대표는 김한길 의원이었다. 나는 열린우리당 공천과정에서 김한길 의원과 한바탕 언쟁을 벌인 일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원내대표실로 발령 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재룡이랑 자리를 바꾸게 됐다. 재룡이가 당시에 기획국장이었는데 이번에는 연구원의 총무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당연히 재룡이가 받고 있던 2급을 받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김한길이 나한테 보복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2급을 국장인 나를 젖히고 부국장 하는 사람한테 주기도 했다. 국회직은 원내대표의 사유물이 됐다. 지금도 그렇다. 뒷 끝 긴 보복 이었다.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렇게 해서 나는 처음으로 국회직인 정책연구위원 4급 상당의 공무원이 됐다. 내가 국회직 공무원이 되기 바로 전에 나는 청주의 어머니를 찾아뵀다. 어머니는 백내장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청주에 갔다가 아는 사람들을 만나 술을 엄청 먹었다. 다음날 국회로 출근을 해야 하는데 술 냄새가 나서 조금 늦게 출발을 했다. 12시쯤 해서 서청주 톨게이트를 들어서는데 경찰이 음주 단속을 하고 있었다. 전날 먹을 술이 아직 덜 깼는데....내가 생각해도 술 냄새가 나고 있었다. 환장할 일일세......
나는 어쩔 수 없이 톨게이트에서 통행증을 뺐다. 그리고 경찰이 들이댄 음주 측정기에 큰 호흡으로 후~~~~하고 불었다.
음주 측정기에서는 삐 하고 소리가 났다. 나는 걸렸구나! 했다. 그런데 경찰이 경례를 하면서 안녕히 가십시오! 했다. 순간 나는 액셀레이터를 확 밟았다. 그런데 차가 나가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던 것이다. 만약 이날 음주 단속에 걸렸다면 공무원이고 뭐고 앞으로 정치인생에도 큰 타격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톨게이트를 나와 중부휴게소에 와서 한잠 잤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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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와 함께 |
[나의 인생살이 83
당이 망하는 소리가 들린다.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안을 기각 했다. 다시 대통령 직무에 복귀 한 것이다. 많은 촛불 시민들의 저항이 일정정도 영향을 미친것으로 보인다. 이후 5월 20일 노대통령은 열린우리당에 입당한다. 그날 나는 국회의원 중앙위원 합동 청와대 만찬에 초청을 받아서 갔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국회에서는 김근태 원내대표가 총선이후 사퇴를 하고 천정배의원이 우리당 원내대표로 선출 됐다. 우리당은 당의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4대 개혁 입법으로서 ‘국가보안법 폐지’, ‘과거사 진상 규명법’, ‘사립학교법’, ‘언론 개혁법’을 개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당내에서는 개혁세력과 실용세력과의 투쟁이 시작됐다.
총선 때 관료들을 많이 공천해서 이 사람들이 당선되고 나니까 실용을 내세우며 당내 이념투쟁을 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한나라당을 필두로 한 보수 세력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한나라당은 16대 대선에서 이회창을 내세웠으나 역시 아들의 병역문제나 낡은 세력의 이미지를 넘지 못해서 패배했다. 한편으로 차떼기로 대선자금을 나르는 등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해 결국은 여의도에 있던 당사도 팔고 천막당사를 지어서 개고생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박근혜를 앞세워 당의 새로운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공천에서도 새로운 인물들을 많이 영입하기도 했다. 정동의 의장의 노인폄훼 발언을 기회로 이들은 121석의 의석을 차지했다. 당초에는 100석도 어려울 것이라고 봤는데 엄청 선전 한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열린우리당의 공천 실패가 한 원인이기도 했다. 이번 19대 총선에서도 똑 같은 일을 저질렀다. 민주당의 병폐라 해야겠다.
한나라당은 4대 개혁 입법에 대해 완강하게 저항하면서 사립학교 등을 등에 업고 장외투쟁도 감행 했다. 이렇게 돼 결국 2004년 말, 천정배 원내대표는 연내에 4대 개혁 입법을 완수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게 댔다. 차기로 정세균 의원이 원내대표가 됐다. 한편으로 2004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특별법은 서울을 수도로 보아온 관습헌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수도 이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수도는 서울이라는 것이 관습 헌법에 해당하므로, 수도 이전을 위해서는 헌법 개정을 통해 수도의 위치를 삽입하거나, 수도가 서울이라는 법적 확신이 소멸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헌법재판소는 8:1로 위헌 판결을 내리면서 ‘관습 헌법’이라는 개념까지 동원했다.
이렇게 되자 충청권이 엄청 반발했다. 그렇게 해서 행정수도가 아닌 정부부처를 일부 옮기는 선에서 행정도시를 만드는 것으로 타협을 했고 여기에 박근혜가 숟가락을 살짝 얹었다. 그리고는 2005년 3월 2일, 행정도시 특별법이 국회에서 가결됐다. 박근혜는 지금의 세종시가 자신의 업적이라고 사기치고 다녔다. 그리고 지난 대선에서 짭짤한 재미를 봤다.
당은 혼란스러웠다. 계속되는 재보궐 선거에서는 연패를 거듭 하고 선거에서 지면 지도부가 물러나고.....개판 이었다. 2005년 4월 2일 정기전당대회를 통해 당선된 문희상 의원은 양극화해소와 동반성장, 그리고 당의 리더쉽강화를 내세웠으나 당 의장 취임직후 실시됐던 4월 재보궐 선거와 10월에 실시된 두 차례의 선거에서 패배하게 되자 정치적 책임을 지고 상임중앙위원들과 함께 사퇴했다.
11월 쯤 우리당은 비상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원내대표를 맡고 있던 정세균 의원을 당 의장에 겸임 선출했다. 강력한 당권을 장악한 정세균 의장은 어수선했던 당내 분위기를 다잡고 한편으로 보수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립학교법개정안을 한나라당의 물리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이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는 당직자들의 엄청난 노고가 있었다.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이 조금이라도 개혁적 입법을 통과시키려 하면 무조건 방해를 했다. 국회의장석을 점거하기도 했다. 물론 과거 민주당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누가 먼저 의장석을 점거하느냐 하는 것이 사실은 법안 통과의 열쇠였다. 그래서 원내에서는 우리당 의원들을 회의 전날 본회의장에 들여보내 의장석을 점거 하게하고 당직자들을 로텐더 홀에 불러 모아 한나라당 의원들의 본회의장 진입을 막고 그리고 대열이 정비되면 그 다음에 한나라당 의원들의 본회의장 입장을 열어 주는 작전을 썼다. 개판이다. 이렇게 몇 번을 하게 되면 이제는 원내에서는 법안 통과를 위해 온갖 전술이 짜여지게 된다. 쇠사슬로 몸을 묶기도 하고....
한나라당이 국회를 장악한 18대 국회에서는 민주당 의원들이 국회에 몰래 본회의장에 들어가서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기도 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당직자들이 본회의장 문을 막아서고 잠시 후 한나라당 의원들이 몰려온다. 그러면 또 드잡이가 시작된다. 상임위원회 회의장을 걸어 잠그고 그리고 이를 뚫기 위해 소방호수, 망치, 해머, 드릴.....온갖 도구들이 난무한다. 본회의장에 들어가려고 한나라당 여성의원들이 우리 당직자들을 꼬집고 할퀴고 어떨 때는 뒤엉켜 있으면 누가 의원인지 당직자 인지 구분이 안 된다. 진짜로 이럴 때는 힘 센 운동선수 의원이 있으면 최고다. 진흙탕 싸움이 벌어진다.
국회에서 싸움이 붙으면 한나라당 당직자들은 우리당 당직자들을 이기지 못한다. 우리는 그동안 독재와 싸워온 경험이 있어서 아주 잘 싸운다. 본회의장 유리창은 수시로 깨진다. 이것이 대한민국 국회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싸움에서 이기면 당 지도부들은 당직자들이 최고라고 치켜세운다. 하지만 선거에서 지면 그 책임을 당직자들한테 돌린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보다.
그렇게 해서 사학법이 통과 된 것이다. 과거 1999년 전교조 법안도 날치기 되는 사이에 얼렁뚱땅 통과 됐다. 날치기......
이를 빌미로 한나라당은 국회 밖으로 나가 연일 시위를 계속했다. 추운 겨울에 개고생을 한 것이다. 이후 김한길 의원이 2006년 1월 원내 대표가 되고 이재오가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되고나서 소위 산상협상을 통해 이들을 끌어안았다. 나는 그냥 냅두었으면 했다.
2005년 7월 28일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지역구도 극복을 위한 선거제도 개편을 전제로 총리지명권, 조각권 등을 한나라당이 행사하는 대연정을 한나라당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진보·개혁진영 내부의 자중지란만 초래하고 상황은 종료됐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과연 국민들이 그것을 용납할 것인지도 따져보지 않은 노무현 대통령의 객기는 정말 싫었다. 국가보안법의 폐지와 형법으로의 흡수도 결국은 노 대통령이 하지 않겠다고 해서 무산 됐다.
노대통령의 대통령 직무와 관련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나는 이것에 대해서는 개관적 평가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소신발언과 살아온 과정, 그리고 대통령 시절의 각종 발언, 퇴임 후의 삶 등은 감성인 것이다. 그러한 감성적인 것에 대해서는 참 잘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인간 노무현과 대통령 노무현은 다른 것이다. 마지막의 비극적 삶의 마감 때문에 대통령 시절의 정책실행에 대해 객관적 비판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민주세력 내부의 분열의 씨앗이 됐다. 감성정치가 판을 친다. 도둑놈도 포장만 잘하면 잘 팔린다. 특히 민주세력들이 포장 정치를 잘한다. 대중추수주의에 빠져서 허우적 된다.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당시 당 의장과 원내대표를 겸하고 있던 정세균 의장이 2006년 1월 2일 산업자원부 장관으로 내정되면서 당 의장을 사퇴했다. 세상에 당 의장을 하고 있던 사람이 뭐가 급해서 장관으로 낼름 간다냐? 당의 사정을 고려치 않은 이러한 엇박자는 당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당은 대통령을, 대통령은 당을 원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1월 8일 유재건 의원이 임시 당의장을 승계했고, 1월 23일 김한길 의원이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우리당은 2006년 5월 31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2월 18일 임시전당대회를 개최해 새로운 당의장에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을, 최고위원으로 김근태, 김두관, 김혁규, 조배숙 의원을 선출했다. 전대 이후 당직 개편을 통해 나는 원내 기획국장으로 발령 났다. 어느 날 김한길 원내대표가 원내기획실 업무보고를 하라고 했다. 갔더니 김한길 원내대표가 박영호 동지가 여기에 왔군 했다. 나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김한길 대표는 내가 공천에서 떨어지고 중앙위원으로 있을 때 당시 총선 기획단장을 하면서 여론조사 등을 가지고 공천의 전횡을 행사하고 있을 때였다.
홍의락(당시 경북출신 중앙위원, 현 국회의원) 위원이 자신의 공천과 관련해 회의에서 신상발언을 하는데 경선도 붙여주지 않는다는 발언을 하니까 김한길 당시 공천기획단장이 중앙위원들이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하냐고 하면서 발언을 막아섰다. 나는 즉시 일어나서 김한길 단장한테 중앙위원이 회의에서 신상발언 하는데 중앙위원도 아닌 사람이 왜 가로 막냐고 소리를 지른 적이 있다. 그랬더니 나를 째려 봤다. 나는 한발 더 나가고 싶었는데 옆에서 말렸다. 그런 악연이 있었다.
우리당은 2006년 5월 31일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전북 한 곳만 얻고 참패를 당했다. 이 와중에 나의 절친인 김혜혜가 춘천시의원에 열린우리당 후보로 나간 것이다. 강원도 최초의 지역구 시의원에 당선 됐다. 나는 혜혜가 잘할 것이라고 보고 적극적으로 권유를 했다. 하지만 혜혜는 처음에는 망설였다. 그러더니 결심하고 나서 당당히 당선된 것이다. 혜혜는 2010년 지방선거에서 강원도 기초의원 중 최다득표로 재선에 선공한다. 아마도 강원도에서 기록을 계속 세워 나갈 것이다. 나는 2014년 지방선거에서 혜혜가 춘천시장에 나가서 역시 강원도 최초의 여성시장이 됐으면 한다. 그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지방선거에서 대패하고 정동영 의장이 물러나고 김근태 의원이 당 의장직을 승계했다. 나는 김근태 의장이 되면 뭔가 당이 바뀔 줄 알았다. 하지만 김근태 의장이 들어섰는데도 당은 변하지 않았다. 김근태 의장은 당에 서민경제회복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서민경제회복과 기업의 투자활성화, 일자리창출을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과 10월의 재보궐 선거에서 연패 했다. 그리고 또 물러갔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이 다시 당 의장을 승계한다. 3개월, 6개월짜리, 재보궐 선거용 당 의장이 수시로 나왔다.
당이 개판이 됐다. 침몰하는 타이타닉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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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와 딸 |
[나의 인생살이 84
백년 가는 정당을 하자던 열린우리당이 문을 닫다.
대선이 1년 앞으로 다가 왔다. 국민들과 당원들은 이 상태로는 정권 재창출이 어렵다고 보고 당의 강력한 개혁을 요구 했다. 한편으로 지방선거에서 살아남은 민주당 세력 일부와(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에 참여하지 않은 평화민주개혁세력 등이 대단결 해 대통합신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2006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한편 열린우리당은 혼란을 거듭 했다. 난파선에서 누가 먼저 내리느냐가 화두가 됐다. 정권 재창출이 어렵다는 이유로 일부 의원들이 탈당하기 시작했다. 2007년 1월 달에 5명, 2월 달에는 전국대의원대회를 앞두고 김한길이 주도해 23명이 집단 탈당 했다. 2007년 6월에는 추가적으로 16명이 탈당하면서 2004년 4월 15일 총선 때 152석 이었던 의석수는 73석으로 줄게 됐다.
그렇게 해서 열린우리당은 원내 1당에서 2당으로 전락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이런 가운데 1월에는 장영달 의원이 원내대표로 선출댔다. 그리고 열린우리당은 2월 14일 전국대의원대회를 개최해 정세균 의원을 당 의장으로 선출 했다. 대회에서는 대통합을 통한 2007년 대선승리를 결의하면서 대통합신당의 추진권을 위임 받았다.
당직자로써 참으로 허무 했다. 자고 일어나면 어느 날 사무실이 줄어들고 옆에는 어제까지 같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던 당직자들이 다른 당의 당직자가 돼 있었다. 밥그릇이니 뭐라 하지도 못했다. 소신을 굳이 따지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것도 소신이라고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얼마 후에 합당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누가 주도권을 쥘 것인가 하는 패권만 남았다. 탈당과 합당은 일종의 국민들 눈속임에 불과 했다. 내용이 없고 변할 것도 없었다.
그 뒤로 열린우리당을 탈당 한 김한길 의원은 2007년 5월 중도개혁통합신당을 만들었다. 이후 추가로 탈당한 사람들과 민주당을 탈당한 사람들이 6월 달에 다시 중도통합민주당을 만들었다. 이후 한나라당 내 경선에 대해 문제제기 하면서 탈당한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는 6월 선진평화연대를 만들어 통합을 대기하고 있었다.
한편 오충일 목사님을 비롯한 재야세력들도 대기 하고 있었다. 이들은 8월 5일 대통합민주신당을 만들었다. 하도 자주 바뀌어서 나도 헷갈리네....열린우리당은 8월 18일 일산의 킨텍스에서 대통합민주신당과의 합당을 의결하고 해산을 결의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은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합당 됐다. 그리고 자동해체 됐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백년정당을 만들겠다고 하던 사람들은 모두 나가 버렸다. 유시민씨는 보건복지부 장관을 한다고 탈당해 버렸다. 한편으로 통합을 거부한 민주당(새천년민주당의 후신)은 또 그대로 밖에 있었다. 박상천의원 등 이었다. 이들도 나중에 2008년 총선을 앞두고 2월 달에 다시 합당해 통합민주당을 만들었다. 다시 민주당이 됐다. 돌아 돌아 2003년 9월 경 새천년민주당에서 분당해 결국은 5년 만에 다시 하나의 당이 됐다. 새천년민주당 세력과 친노세력, 오충일 목사님을 비롯한 재야세력,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 전 도지사 세력 등이 합친 것이다. 그렇게 해서 2008년 총선에 나섰다. 박살났다.
2007년 8월 18일 일산 킨텍스에서 벌어진 열린우리당 해체를 위한 전국대의원대회는 가관이었다. 대의원 숫자를 맞추기 위해 대의원 자격을 정리했다. 그리고 해체에 반대하는 일부의 사람들이 대회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려고 했다. 나는 당직자로써 이들의 대회장 입구를 봉쇄했다. 현장을 막고 있는 나의 모습이 참으로 한심했다. 해체를 위해서는 대의원 2/3의 찬성이 있어야 했다. 솔직히 그 숫자가 맞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찬성자들이 기립투표를 했는데 정확히 셀 수가 없었다. 2/3를 넘겨야 했기 때문에 조금씩 숫자를 불렸다. 나중에 다 더하니 숫자가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 참후에 가결을 선포했다. 그렇게 해서 열린우리당은 문을 닫았다.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월급 받는 당직자가 됐다는 생각에 좌절감과 허무감이 밀려왔다. 뭐하는 짓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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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민청 이명호 동지 |
[나의 인생살이 85
정권을 넘겨주다.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당적이 바뀌고 나서 나는 정책위 정책국장에서 노동 전문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유는 특별히 없었다. 통합 하면서 자리 나누기 때문에 잠시 밀린 것이다. 하지만 얼마 후 다시 정책국장으로 돌아 왔다.
당 에서는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나는 정당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누구의 계보에 속해보지 않았다. 대강의 정치인들은 자신이 모시는 정치인과 깊은 사적 관계를 가지면서 계보를 형성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특별히 그럴 필요도 못 느꼈다. 그냥 나 혼자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누구를 존경하거나 해야 할 사람이 없어서였다.
대통령 후보가 정동영으로 선정됐다. 나는 정책위에 소속돼 있었기 때문에 국회 내에서 입법과정에 더 신경 써야 했다. 연말에는 정기국회가 열리기 때문에 원내 팀들은 국회를 보좌해야 했다. 그래서 중앙당의 정치일정에 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다. 우리는 정기국회가 끝나고 나서야 선대위에 결합했다. 나는 농어촌 특별본부에 파견됐다. 새천년민주당 때 대변인실 국장을 하던 축호 형을 대통합민주신당을 하면서 다시 만났다. 나랑 같이 정책국장을 했다. 그러고 보니 대통합민주신당을 하면서 새천년민주당때 헤어졌던 당직자들을 모두 다시 만났다.
나는 선대위에서 대형 유세차 한대를 배정 받았다. 그걸 가지고 전국에 마음대로 돌아 다녔다. 기사 아저씨와 둘이서 이 대형 유세차를 몰고 가다가 연설을 할 곳이 생기면 그냥 연설을 했다. 이것은 불법이었다. 하지만 나는 편법을 동원했다. 각 시도단위로 배정된 차량이 고장 나서 교체차량으로 가는 중이라고 둘러댔다. 그리고 충남으로 울산으로 경북으로 충북으로....정말 구석구석 돌아 다녔다. 그런데 다녀보니 이미 선거를 해보나 마나 한 상황이었다.
전남으로 갔다. 역시 달랐다. 우리가 몰고 다니는 차가 불법이었는데 경상도 쪽에서는 조금만 떠들어도 금방 선관위가 와서 못하게 했는데 전남에서는 거의 선관위가 오지 않았다. 선관위가 편향돼서가 아니라 경남에서는 신고를 하고 전남에서는 신고를 안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20일 이상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선거운동을 했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이명박이가 엄청난 표차로 대통령이 됐다. 질것을 졌으니 멘붕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민주정부가 더 연장되지 못하고 10년 만에 문을 닫았다는 것에 화가 났다. 노무현 대통령이 야속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어찌 됐건 정권이 재창출되도록 했는데......
황당했다. 한편으로 당황하기도 했다. 여기서 잠시 황당과 당황의 차이를 실례를 들어서 알아보자! 우선 황당 이란 트럭 뒤에서 오줌 누고 있는데 트럭이 시동을 걸고 앞으로 가면 황당한 것이 된다. 반면 트럭이 후진을 해오면 당황 해 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에게 피해가 오면 당황하게 하게 되고 피해를 주지 않으면 황당해 지는 것이다. 그냥 웃어보자!!!
대선에서 지고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당 대표가 됐다. 이날 이해찬 전 총리는 민주당을 탈당 했다. 한나라당 출신의 손학규 하고는 같이 일을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시민통합당이라는 가설정당을 만들어 19대 총선 전에 다시 당에 들어왔다. 탈당과 합당....누구는 해도 되고 누구는 안 되고? 이제 우리나라에는 탈당과 합당에 대해 누구도 비난할 사람이 없다. 정치가 그런 것이다.
손학규 전 지사는 원래 민주화 운동을 했는데 93년 김영삼 정권 때 민자당으로 국회의원이 된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2007년 3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탈당해 대통합민주신당에서 정동영 등과 함께 대선후보 경쟁을 했으나 졌다. 어찌 됐던 당은 4월 총선을 앞두고 박상천씨가 이끌던 민주당과 2월쯤에 마지막으로 통합하고 이름을 통합민주당으로 했다. 그리고 총선이 치러졌다.
청주에서 기자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번에 출마 안하냐고....나는 여운을 남기는 정치적 발언을 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출마할 여력이 없었다. 나는 당에 있을 때 틈만 나면 당직자들 보고 출마하라고 했다. 정치인은 출마해야 한다. 그래야 정치인이다.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여론이 엄청 나빴다. 그러니 출마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와중에 경기도에서는 화성시 갑, 을 지역구에 출마자가 없었다. 총선 후보 등록을 며칠 남겨두고 먼저 당직을 하던 이원욱 선배(내가 처음 99년에 당에 들어갔을 때 같이 근무함)가 화성 을 지역구에 출마하겠다고 나갔다. 아무 연고도 없는데 대단한 판단이었다. 그 해 이원욱 선배는 낙선했다. 그리고 4년을 준비해 작년 19대 총선에서 당선 됐다. 대단한 사람이다.
나는 중앙당 여성국장을 하고 있던 송옥주국장 보고 나가라고 했다. 옥주는 나하고 동갑으로 연대를 나오고 새천년민주당 시절 같은 당직을 했고 내가 사무직당직자협의회 회장을 할 때 부회장으로 같이 일했으며, 연구원에 있을 때 총무국장을 했던 친구다. 당시에 여성국장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옥주는 고향이 화성이었다. 그래서 선거 후보 등록 당일 날 점심을 먹고 당에 오니까 옥주가 출마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옥주를 데리고 화성으로 갔다. 내일이 후보등록 마감이다. 나는 우선 총무국에 옥주 공천장을 만들어 주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집권당을 했는데 경기도에 후보도 못 낸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옥주한테 선거실무는 내가 책임 질 테니 나가자고 했다. 국장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말이다. 개 발에 땀났다.
지역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서부간선도로를 탔다. 내려가면서 홍보할 사람한테 전화를 했다. 그리고 선거유세차량 준비, 사무실 준비를 차안에서 전화로 해결했다. 어떻게 선거를 치렀는지 모른다. 선거는 깔끔하게 치렀다. 상당한 득표력을 보였지만 졌다. 옥주는 그 후 지역구를 떠나 지금은 당직자로 일하고 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역시 당직자 출신인 오일용 후배가 위원장을 맡아 19대 총선에 출마했다. 아깝게 석패했다. 다음에는 잘되리라 믿는다.
18대 총선에서는 81석을 얻는데 그쳤다.(지역구 66, 비례 15) 지난 17대 총선에서 152석을 얻었던 세력이 정권 잡은 지 불과 4년 만에 반 토막이 난 것이다.
정권도 빼앗겨 의회권력도 빼앗겨....완전히 거지가 됐다. 당장 당의 국고보조금이 전년에 비해 1/3이상 줄어들었다. 당연히 당직자들 월급을 줄여야 했다. 한편으로 대선과 총선에서 연달아 대패 했으니 시도 당에 대한 장악력도 떨어졌다. 완전히 당이 풍비박산 했다.
나는 당직자들을 차기 지방선거에 내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향 연고가 있는 사람들을 시도당의 사무처장으로 파견 보내서 이 사람들의 정치적 활로를 찾도록 해주자고 제안했다. 한편으로는 시도에 중앙당 당직자가 파견이 나가니까 결국은 중앙당에서 시도 당에 돈과 사람을 지원하는 모양이 됐다. 다만 시도 당 위원장과 협의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를 당헌에 반영했다.
통합민주당은 2008년 7월 쯤 전국대의원대회를 통해 정세균 의원을 당 대표로 선출했다. 그리고 당명을 민주당으로 개정했다. 그러고 나서 당직자들에 대해 시도 당 사무처장으로 파견을 내기 시작했다. 나는 제일 먼저 강원도로 신청했다. 그랬는데 당시 강원도당 위원장 이었던 이광재 의원이 반대를 했다.
당시 사무총장은 이미경 의원이었고 수석부총장은 김교흥 전 의원이 맡고 있었다. 강원도에서 이광재 위원장이 나에 대해 반대를 해서 중앙당과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랬더니 중앙당에서는 나를 장차로 청주에서 정치를 할 것이니 이광재가 반대도 하니 충북도당의 사무처장으로 가라고 했다. 나는 알았으니 공고를 붙이라고 했다. 그런데 공고가 붙지 않고 있었다. 알고 보니 당시 충북도당 위원장이 이시종(현 충북도지사)의원 이었는데 오재세 의원과 노영민 의원 쪽에서 반대를 한다고 하면서 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3개월을 버텼다. 발령을 내 달라는 것이었다.
어느 날은 오재세 의원을 만났다. 잘 할 테니 받아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이시종 도당위원장을 만나서 열심히 할 테니 중앙당과 협의를 해서 받아달라고 했다. 물론 노영민 선배도 만났다. 나름대로는 쪽팔림을 무릅쓴 것이었다. 그래야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국회 본청 앞에서 정세균 대표를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도 나의 문제를 말했더니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도 발령이 나지 않았다. 당연히 내가 충북으로 가면 오재세의원이나 노영민의원 입장에서는 불편하겠지. 월급 받아 가면서 지역구 관리하고 여차하면 19대 총선에서 경쟁자가 될 수 있으니 반대 할 수 있겠지.....하지만 중앙당에서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몇 차례 찾아가 발령을 낼 것을 요구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미경 사무총장을 만났는데 하시는 말씀이 박 국장 국회의원들이 저렇게 반대를 하는데 내가 이기지 못하겠네 했다. 나는 그날로 사표를 냈다. 아무 대책도 없이 직장을 버린 것이다. 무슨 깡다구가 이런 것이 다 있나......며칠이 지나자 직장이 없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내가 미쳤지....당시 다른 시도 당에서는 중앙당 당직자를 거의 다 받았다. 부산에서는 김정균 선배가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나랑 같이 사표를 냈다.
당시 부산의 시 당 위원장은 조경태(현 최고위원)의원 이었다. 두 곳에서만 협의가 되지 않았다. 협의니 뭐라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옳지는 않다고 봐야겠다. 지금 같으면 단식투쟁이라고 할 것 같다. 노동자들이 단식하고 굴뚝에 올라가고 하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다. 배가 고픈 걸로만 생각했는데 거기에는 사회전반에 대한 투쟁도 깔려 있음을 나중에 알았다. 밥이 철학이요, 밥이 정의였다. 나는 밥은 그냥 먹는 줄 알았다. 그런데 밥줄이 끊기니 새롭게 보였다.
그때부터 나는 낚시를 다니기 시작 했다.
86편 이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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