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희의 풀꽃이야기-4월 둘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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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희의 풀꽃이야기-4월 둘째주

이광희 숲해설가  | 입력 2013-04-08 오전 07:19:16  | 수정 2013-04-08 오전 07:19:16  | 관련기사 1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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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꽃박람회가 문을 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시작하는 꽃박람회랍니다. 세계 어느 곳이나 꽃박람회는 늘 인기 있는 단골 프로그램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꽃박람회가 열리고 굳이 박람회장이 아니어도 지금 세상은 봄꽃들의 축제로 술렁입니다. 우리네 주변에서 시작하고 있는 꽃들의 축제를 동네 어귀에서도 맛볼 수 있습니다.

 

이번 주 풀꽃이야기는 너무 흔하고 평범한, 그래서 더 많은 추억을 만들어온 흔한 꽃과 개인적 추억을 담습니다.

 

 

앵두나무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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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1학년 4-H연구회라는 써클에 가입했다. 가입동기가 딱히 없이 지나가다가 그냥 걸렸다. 호객행위(?)를 선배들이 잘한 것도 아니었다. 책상 놓고 써클(당시에는 써클이라고 했다)모집하는 사람들 사이로 정말 그냥 가입했다. 그렇게 가입한 써클이 내 인생에 중대한 역할을 할 줄은 당시에는 몰랐었다. 가입 얼마 후 선배들 몇몇은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연루됐다며 녹화사업 대상자로 군대로 떠났다. 농촌문제 연구회가 대학4-H로 바뀌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았다.

 

흉흉하던 소문들 사이로 대학생활 첫 봄이 오던 날 농대 뒤편 과수원 운영자가 써클 선배의 아버님이라는 것을 알았다. 써클 부회장이었던 선배를 따라 과수원을 찾았을 때 과수원 안 집 앞에는 앵두가 한창이었다. 빨갛고 달콤한 그 앵두를 정말 맘껏 따먹었다. 배가 부를 정도로 따먹었던 그 앵두는 당시 시대적 암울함과 답답함, 공허함 그리고 허기져있었던 배고픔과 갈증을 해소하기 충분했다.

 

돌아오던 길 몇 날 동안 복통에 시달렸다. 화장실을 들락거리던 그 고통이 지난 후에도 봄이 오면 피어나던 그 앵두나무의 화사한 꽃들을 잊지 못했다. 이어 달리던 빨간 앵두의 달콤함을 느끼기 위해 늘 재래시장 종지로 판매되던 그 앵두를 사곤 했다. 앵두는 그렇게 공허함과 허기짐으로부터의 탈피를 상징했다. 누구는 앵두나무가 우물가를 떠올린다지만 내게는 80년대 초반 칙칙하기만 했던 젊은 시절 자유를 떠올리는 상징이다. 그 붉은색 앵두의 빛깔은 지금도 선명히 남아있는 나만의 추억이다.

 

 

명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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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자나무는 꽃과 잎이 함께 나온다. 꽃봉오리가 몽글몽글 뭉쳐 피워내는 모습은 왜 이 녀석을 각시꽃이라고도 하는지 알 수 있다. 폭발하듯 피어오르는 명자나무는 담장용 울타리로도, 개별로 꽃을 즐길 때도 예쁘다. 워낙 많은 꽃을 붉게 피워내기 때문이다.

 

장미과이며 작은 키 나무인 명자나무를 볼 때마다 '명자-아끼꼬-쏘냐'라는 제목의 영화가 생각난다. 촌스런 이름 '명자'이기 때문일까? 지금 몽글몽글, 아니 몽실몽실 피어오르고 있는 중이다.

 

 

동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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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김유정의 소설 동백꽃 중에서

 

겨울에 피는 동백꽃이 봄 오는 지금도 피어있습니다. 소설속의 동백꽃 향기는 아무리 맡아도 잘 나지 않습니다. 오로지 점순이가 있을 때만 나는 냄새일까요? 동박새가 수정을 해줘야 꽃이 피는 동백꽃은 조매화입니다. 굳이 냄새피울 필요가 없는 거지요. 사실 소설가 김유정이 표현한 노란색 알싸한 향긋한 그 동백은 '생강나무'를 말하는 거였답니다. 강원도에 뭔 동백꽃이 있었겠습니까?

 

남쪽 바닷가에는 동백 숲 자생지도 많습니다. 동백기름으로 여자들의 머릿기름으로, 혹은 등잔불 기름으로 쓰기도 했다는 군요. 바닷가에서 송이 째 뚝뚝 꽃잎 떨구는 동백꽃을 보고 왔습니다.

 

 

진달래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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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청원군 두루봉동굴은 4만 년 전 흥수아이라 불렸던 6~7세의 완전한 인체 뼈가 발견됐으며, 두루봉의 새굴 유적에서는 지금까지 남한에서 코끼리뼈가 처음 발견된 곳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진달래 꽃가루 157개가 검출돼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의 꽃 역사를 간직한 곳이 됐습니다.

 

구석기시대에 진달래꽃으로 치장한 사람들과 진달래를 주고받았을 사람들, 석회암 동굴 속에서 사랑하던 아이의 주검에 진달래와 국화꽃을 받친 사람들의 이야기가 고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진달래꽃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가장 오래된 꽃 이용 기록은 이라크의 샤니다르 동굴에서 검출된 4만 년 전 꽃가루 화석이었다고 하는데 청원 두루봉 동굴의 진달래 꽃가루 화석이 이 기록을 갱신하게 된 거지요.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진달래꽃 노래는 이미 수만 년 전 한반도 구석기 시대부터 이어오던 우리나라 사람의 진달래꽃 사랑의 정서를 담고 있었답니다.

 

개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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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의 원산은 한국이다. 왜 개나리 이야기에 인도 공주가 등장해야 하는지 오히려 알 수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네 산야 개나리 자생지를 본 적이 있는가?

 

대부분의 식물들은 유전자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웬만하면 자가 수정을 피하는 쪽으로 진화 해 왔다. 그러다보니 수술과 암술 모두 가지고 있는 양성화는 암술과 수술의 성장 시기를 조율해 다른 놈과의 수정을 꾀하게 된 것이다.

 

개나리는 인간에 의한 꺾꽂이 번식을 하는 과정에서 암술이 수술보다 더 일찍 성숙하는 장주화의 화분을 가지고 있는 녀석으로만 대량 증식하게 됐다. 물푸레나무과 줄기속이 비어있는 개나리의 자생지를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다.

 

당연히 개나리는 스스로 발아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스스로 번식을 포기하게 되는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손이 아니면 번식 할 수 없는 개나리는 어쩌면 유전적으로는 멸종상황이라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개나리 노란 꽃그늘 아래 가지런히 놓여있는 꼬까신하나"

 

개나리 노란 꽃그늘 밑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노란색 안녕과 봄 오는 길목 행복을 노래하고 있는데.

 

 

목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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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엄청난 수해를 입어 집이 잠긴 이모 댁에 놀러갔다가, 피신한 동네 초등학교 난민들을 둘러보고자 방문한 육영수여사를 본적이 있었다. 자세히 보고자 다가갔다가 수재민의 아이인 줄 알고 나를 안아주던 육영수여사를 지금도 기억한다. 박정희의 폭정을 알지 못했던 시절 육 여사가 총탄에 희생되고, 육 여사 일대기가 책으로 나오자 바로 읽었다. 초등학생시절 읽은 가장 두꺼운 책, 그곳에서 육영수여사는 목련꽃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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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끝만한 흠집만으로도 목련은 이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이렇게 기억되던 순결하던 그 꽃 목련은 여전히 육영수여사와 오버랩 돼 기억에 남아있다. 성장해가며 인간에 대한 고민과 삶을 나름의 시각으로 이해해 가면서도 육영수라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나에게는 또 다른 인상으로 남게 됐다. 그것도 봄이면 찾아오는 목련의 순백색 아름다움으로 오버랩되는 육영수여사와 목련... 어린 시절의 기억이 이래서 무서운지도 모른다. 여전한 기억은 봄마다 되풀이되고 있다.

 

 

벚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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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상징하는 꽃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벚꽃과 국화를 떠올리게 됩니다. 잔다르크가 참전한 전쟁이 백장미파(?ㅎㅎ)와 홍장미파(가문들을 상징하는 문장으로 구별합니다)간의 장미전쟁이었던 것을 보면 꽃으로 어느 집단, 혹은 국가를 상징해왔던 거지요.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에서는 자두꽃(오얏꽃)을 상징 꽃으로 활용했다지요? 성이 이(李)씨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태동해서인지 연꽃을 상징으로 했습니다. 고구려는 삼족오의 문양과 함께 벚꽃문양을 주로 사용했다더군요. 이미 벚꽃은 고구려의 상징이었던 셈인게지요.

 

대한제국의 19세기 말 고종황제는 배꽃(이화)을 주로 상징문양으로 사용했답니다. 고종황제의 초상화 속 단추도 이화문장이 사용됐으며 고종의 전용차량 번호판 문양도 이화문양 이었답니다. 지금은 주로 무궁화를 사용하구요. 청와대와 국가 공식문양으로 무궁화 문양을 사용합니다.

 

무심천 벚꽃 그늘 속에서 고구려를 떠올려보면 어떨까요? 아무리 충북도청 도지사실 천정에 그려져 있었다는 일본인들의 벚꽃문양과 무심천 벚꽃 나무의 식재로 지금의 무심천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만 기왕이면 더 오래전 고구려인들이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스스로의 이유를 만들어보는 것이 더 좋을 듯 하네요.

 

 

 

 

이광희 숲해설가 gsinew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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